[삶과 문화] ‘꽃맹’을 위한 변명

입력
2019.10.02 04:40
31면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함께 피었다. 흰 게 구절초, 연보라색을 띤 게 쑥부쟁이다. 하지만 꽃 이름을 구별하는 게 그리 중요한 것일까.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함께 피었다. 흰 게 구절초, 연보라색을 띤 게 쑥부쟁이다. 하지만 꽃 이름을 구별하는 게 그리 중요한 것일까.

얼마 전에 친구들과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그 중 한 친구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바위 섶에 핀 가을 야생화는 물론이요, 꽃이 떨어진 나무들 이름까지 척척박사였다. 그뿐이랴? 그 꽃과 나무의 스토리텔링은 알뜰살뜰 덤이었다. 그런 사람과의 동행은 참 격조 있다. 그를 새로 쳐다보게 됐다. 평생 단 한 번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안도현 시인하고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는 짧은 시 ‘무식한 놈’에서 이렇게 말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그래, 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이다. 고백컨대 꽃맹(盲), 나무맹이다. 인생을 그리 헛살지는 않았지만 이맘때면 산야에 지천인 쑥부쟁이, 구절초, 개미취, 벌개미취를 정말 구분하지 못한다. 꽃이 크네 작네, 잎에 톱니가 있네 없네, 주된 색깔이 분홍인지 하양인지 보라인지, 머리에 입력해도 금방 잊어버린다. 나도 한때 뭐 좀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식물도감을 사서 열심히 외우기도 했다. 그러나 색과 모양에 대한 눈썰미가 유독 부족한 나에겐 애당초 넘사벽이었다.

하지만 안 시인께서 설마 들국화 유의 이 고만고만한 놈들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욕한 건 아니었으리라. 주변의 작고 하찮은 것들이라고, 맨날 마주치는 것들이라고,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마음을 주지 못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죽비일 게다.

시 ‘애기똥풀’에서는 그도 고백성사하셨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얼마나 서운했을까요//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전문)

꽃에 대한 관심의 첫째는 이름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앞 구절)

식물 이름 알기에 관심들이 무척 많다. 사진을 찍어 올리면 회원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름을 알려주는 세계 최대 식물도감 토종 앱 ‘모야모’는 수십만 회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단지성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하지만 나처럼 이름을 잘 모른다고 관심과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그저 통성명이 아니라 관계 맺음, 길들임을 말한 것이 아닐까. 마치 지식을 습득하듯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돼 돌아왔다. 나는 꽃과 나무를 만나면 그저 여유 있게 바라보며 교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반려동물보다 ‘반려식물’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1인 가구가 많아진 것도 이유라지만, 그 조용한 여유와 소소한 기쁨 때문일 게다. 나도 아침에 눈을 뜨면 베란다로 얘들부터 보러 간다. 환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잎의 신비로움,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진 않지만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며 향기를 풍기는 여유로움, 한겨울을 보내고 삐죽 솟아나온 새순의 경이로움, 때를 알아서 조용히 피우고 가만히 시드는 우아함, 며칠 신경을 안 쓰면 시든 잎으로 내 게으름을 깨우쳐 주는 지혜….

우리 인생의 모습은 식물성이지 동물성이 아니다. 사람은 나이 먹으면 몸 안에 식물성이 자란다. 식물은 키운다고 안 하고 ‘기른다’고 한다. 기르는 건 마음으로 보살피는 거다. 식물이 인테리어나 사진 배경이 아니라 교감과 반려의 상대라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이름은 아직 몰라도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올 때 못 본/그 꽃”이다. (고은, ‘그 꽃’ 전문)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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