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스피노자의 거미

입력
2019.10.01 18:00
29면
거미와 파리의 관계는 자연의 먹이사슬이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나쁜 만남’일 뿐이지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피지배자의 자유와 생명 자체를 지배자의 의지에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거미와 파리의 관계는 자연의 먹이사슬이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나쁜 만남’일 뿐이지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피지배자의 자유와 생명 자체를 지배자의 의지에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중고등학교와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국민윤리라는 과목을 배웠다. 도대체 윤리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고 무슨 명목으로 온 국민에게 강요했는지 모르겠지만 목표는 뚜렷했다. 반공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주입이다. 하지만 교육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사가 하는 것인지라 선생님에 따라서는 윤리 수업이 훌륭한 철학 수업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교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학생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대부분의 고등학생에게 윤리란 가장 점수 따기 쉬운 암기과목에 불과했다. 정말이다. 공부 좀 하는 친구들은 윤리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보기에 해당하는 철학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 보기의 ㉠ ㉡ ㉢은 어떤 철학자의 사상을 나열했다.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에는 그 철학자의 유명한 말이 나와 있다. 이걸 보고도 고르지 못한다면 시험을 망쳐도 할 말이 없다.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다.” 소크라테스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다. “아는 것이 힘이다.” 베이컨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 파스칼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다. 생각-데카르트, 갈대-파스칼, 사과나무-스피노자 같은 식으로 간단히 외워두면 윤리 과목 시험을 치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지금도 ‘사과’ 하면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과 함께 철학자 스피노자가 떠오른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도대체 뭘 한 사람인지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우연히 책 한 권이 수중에 들어왔다. ‘스피노자의 거미’가 그것. 내가 스피노자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거미에게는 관심이 많다. 책 제목이 스피노자의 거미가 아니라 소프라노와 거미였어도 관심이 갔을 거다. 그런데 부제가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다. 게다가 저자 박지형 교수는 생화학을 전공하고 토양의 탄소 순환을 연구하는 환경생태학자다. 급 관심이 갈 수밖에. 환경생태학과 거미 그리고 스피노자는 어떤 관계일까?

1676년 11월 네덜란드 헤이그 운하 옆의 작은 벽돌집 2층 다락방에서 진한 향수를 풍기는 젊은이와 수수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마주 앉았다. 젊은이는 미적분을 고안하고 마인츠의 전직 추밀고문관이자 하노버 공작의 신임 사서인 라이프니츠이고 중년의 남자는 암스테르담에서 안경알을 깎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스피노자였다. 은밀한 만남이었다.

두 철학자는 왜 은밀히 만나야 했을까? 당시 스피노자는 “쇠사슬에 묶어놓고 몽둥이 매질을 해야 마땅한 미치광이 악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유태인 사회에서 추방당한 스피노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고 옥사한 친구들이 있을 정도다. 화려한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라이프니츠로서는 자신의 경력을 단번에 끝장낼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스피노자는 왜 굳이 신을 퇴출시켜야 했을까? 그가 전복하고자 했던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을 핑계로 자유를 억압해 온 구체제였다. 스피노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세기 유럽 제국은 신의 이름 아래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신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장시켜나갔다.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보다 합리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하는 외래 침입종이 되었다. ‘최대한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무수한 원주민을 살해하고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스피노자는 거미를 찾아 서로 싸우게 하거나 파리를 거미줄에 던져 놓고는 싸움 구경을 하곤 했다고 한다. 거미가 싸우거나 먹이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며 혹시 그는 당대 유럽사회의 지배자와 거미를 비교하지는 않았을까? 박지형 교수는 이런 상상을 하다가 근대의 기본 가정, 즉 대의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자원 배분 방식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책을 쓴 것이다. 정말로 우리가 믿는 것처럼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가 시민의 합의와 계약에 따라 합의된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거미의 싸움을 보면서 지속하고자 하는 능력과 성향을 뜻하는 ‘코나투스(conatus)’가 모든 사물의 현실적인 본성이라고 파악했다. 쉽게 말하면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원리라는 것이다. 경쟁이 따른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박지형 교수는 생태적 자리(niche)를 나누면서 때로는 과도하게 자원을 점유하는 어떤 종을 생태계가 조절하면서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고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이것과 비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전혀 생태학적이지 않다.

거미와 파리의 관계는 자연의 먹이사슬이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나쁜 만남’일 뿐이지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처럼 피지배자의 자유와 생명 자체를 지배자의 의지에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스피노자가 사과보다 거미로 연상이 된다면 윤리 수업 시간이 훨씬 더 알차지 않았을까?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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