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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연대’ 고리로 보수 통합론 확산
국정 비전ㆍ인적 쇄신 없이 ‘큰집’ 중심
기득권 안 놓겠다는 통합론 진정성 없어
정치란 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건 사람이다. 국회의원 면면을 보면 어떤 나라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자유한국당은 국정 농단으로 나라를 거덜내고도 일절 참회나 반성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부해 금배지를 딴 무능하고 부패한 인물들 그대로다. 그러면서 가장 큰 우파 세력인 한국당 중심으로 통합해야 총선에서 이긴다고 주장한다. 황교안 대표 등이 18일 청와대 앞에서 정권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일화 한 토막.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합리적 보수 성향인 그를 총선기획단장에 임명했다. 윤 단장은 김윤환, 이기택 등 구시대의 상징적 인물들을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총재는 팔짝 뛰었다. “당신 미쳤구먼. 우리 당은 김윤환 사단과 이기택 사단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금 그 양대 산맥의 목을 치라고. 비록 정치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그 어려운 기간 동안 내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 허주(김윤환의 호)와 이기택씨야. 그런데 어떻게 목을 치나. 난 인간적으로 못한다.”(이철희 ‘7인의 충고’)

16대 총선은 DJ 정부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는데도 한나라당 열세가 점쳐졌다. 시민사회단체가 낙천ㆍ낙선 운동에 나서는 등 정치 개혁 열망이 분출하면서 수구 이미지가 불리하게 작용한 탓이다. 윤 단장은 ‘위험한 이상주의자’라는 당 안팎의 거센 공격에도 “민심을 거스르면 한 방에 죽는다”며 개혁 공천을 밀어붙였다. 이 총재는 고심 끝에 윤 단장 손을 들어줬다. ‘킹 메이커’로 통하던 허주를 비롯해 이기택, 서석재, 신상우, 김광일 등 영남권 거물 정치인이 공천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대신 오세훈, 원희룡, 김영춘 등 386세대를 과감히 영입했다. 언론이 ‘금요대학살’이라 부른 파격 공천이었다. 그 결과 한나라당(133석)이 집권 여당인 민주당(115석)을 압도했다.

내년 총선은 문재인 정부 중간평가가 될 것이다. 대개 총선은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에 불리하기 마련이다. 야당은 정권을 견제하는 입장이라 국정 비판만 해도 기본 점수는 먹고 들어간다. 더욱이 조국 사태로 문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유한국당이 우파 규합에만 성공하면 총선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길 법하다.

한국당 지도부는 연일 ‘보수 통합론’을 띄우고 있다. 황교안 대표는 “한국당이 통합만 하면 이길 수 있다”며 ‘반조 연대’를 고리로 우파 규합에 나섰다. 황교안 유승민 안철수 오세훈 원희룡 등이 뭉치면 내년 총선에서 무조건 승리한다는 셈법이다. 앞서 나경원 원내대표가 “유승민과 통합 안 하면 한국당 미래는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당 희망대로 우파만 뭉치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나. 착각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궤멸까지 거론됐던 한국당이 지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국민은 거의 없다. 국정 농단으로 심판받은 세력인데도 진솔한 반성과 사죄는 일절 없었다. 오만하고 무능하며 뻔뻔하고 몰염치하다. 조국의 불공정에 실망한 젊은 세대와 중도층에게 한국당은 여전히 ‘기득권 정당’ ‘부패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국에 실망해도 한국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정당은 국민 다수가 지향하는 바를 수렴해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는 정치 결사체다. 한국당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비전과 가치를 보여준 적이 없다. 더 중요한 건 인물이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속 국회의원 면면을 보면 그 정당이 어떤 나라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한국당은 국정 농단을 주도했던 인물, 부패하고 무능한 구시대 인물, 박근혜에게 충성한 대가로 금배지를 딴 영남권 의원들로 가득하다.

윤 단장은 16대 총선 결과를 보고 “국민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다. 국민이 개혁 공천의 진정성을 믿어준 것이다. 한국당 의원 전원이 삭발을 하면 진정성이 통할까. 난망이다. 황 대표는 “거대 야당 한국당이 (보수 통합의) 중심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국민 다수가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당이 통합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건 코미디다. 구태 정치인들을 모아 세를 불린다고 국민 마음이 돌아설 리도 없다. 정치란 한 시대를 책임지고 꾸려가는 것이다.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참신한 인물들을 배치하는 게 관건이다. 다른 우파보다 세력이 크니 한국당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보수 통합론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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