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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핵위기 당시 ‘핵 상무조’… 리용호ㆍ최선희와 오랫동안 호흡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20일(미국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핵화 협상에서 ‘리비아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방법’을 언급한 것을 환영하며 향후 실무협상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다. 연합뉴스

이달 말 개최될 것으로 예상되는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마주할 김명길(60)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수십 년간 대(對)미 문제를 다룬 ‘베테랑’ 외교관으로 평가된다. 앞서 김명길은 20일 발표한 담화에서 자신을 ‘조미(북미) 실무협상 수석대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30대 초반의 말단 외교관이던 1990년대 초 1차 북핵 위기 때부터 북미 현안에 깊숙이 관여했다. 1차 북핵 위기는 북한이 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맞서면서 초래됐다. 미국의 북폭설과 북한의 ‘서울 불바다’ 말폭탄이 오갔다. 당시 김명길은 리용호 현 외무상과 함께 김정일 정권이 미국과의 핵 협상에 대비해 극비리에 조직한 외무성 ‘핵 상무조(태스크포스ㆍTF)’ 창립 멤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핵TF는 평양 교외의 외무성 산하 고방산초대소에서 합숙하며 가족 접촉마저 금지된 채 외교 전략의 수립ㆍ집행을 전담했다고 한다. 결국 북미는 94년 북한이 핵사찰을 허용하고 미국이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는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김명길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카운터파트이자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의 ‘미국통’ 리용호 외무상과 30년 넘게 호흡을 맞춘 셈이다. 현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 역할을 하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또한 1990년대 중반 한발 늦게 핵 TF에 들어와 김명길과 함께 일했다.

이후 김명길은 2009년 유엔대표부 차석 대사를 마치고 귀환한 후 아태 국장과 베트남 대사로 잠시 ‘외도’하기 전까지 20년간 대미 외교 한 우물만 팠다. 이는 북한이 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외무성을 주축으로 대미 외교의 라인업을 새로 꾸리는 과정에서 스티븐 비건 대표를 상대할 적임자로 김명길이 낙점된 배경으로 보인다. 특히 2007년에는 북미 핵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자금 2,500만 달러 송금 문제 해결에 참여했다. 2011년엔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면담에 배석하는 등 대미 인맥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편 김명길은 자강도 만포시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모를 일찍 잃었지만 공부를 잘해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중 영어를 쓰는 남미국가 가이아나에서 유학했다.

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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