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에 ‘휴전’ 제안한 미국, ARF서 중재 나선다

입력
2019.07.31 17:44
수정
2019.08.01 06:5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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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 이틀 전, 美 고위당국자 “분쟁중지협정 촉구”

폼페이오, ARF 한미일 회담 공식화… 한일 “美 분쟁중지협정 요청 없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0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참석차 출국하기 위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0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참석차 출국하기 위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조치로 충돌하는 한일 양국에 휴전을 제안하고 한일간 협상을 주선하는 움직임에 나섰다. 그간 한일 양국이 스스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거리를 두던 미국이 심각한 한미일 공조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악화 일로로 치닫는 한일 갈등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 정부가 2일 각의에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 제외 결정을 내릴 것으로 확실시되는 가운데, 이를 불과 이틀 앞두고 나온 미국의 외교적 관여 및 중재 노력이 주효할지 주목된다.

미 행정부 고위 관계자는 30일(현지시간) “미국은 협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심각한 외교적 분쟁에 대한 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에 서명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한국과 일본에 촉구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이 당국자는 “미국은 역내 동맹국 간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분쟁 중지 협정 제안이 한일 양국 간 이견 자체를 해소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양측간 협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일정 기간 추가 조치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분쟁 중지의 유효 기간을 어느 정도로 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일 양국 중 어느 한 쪽 편을 들기 어려운 미국으로선 첨예한 갈등 현안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되 양국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협상 판을 깔아주는 역할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아사히(朝日) 신문은 31일 ‘미국, 한일 중재 추진’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미국이 일본에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두 번째 수출규제)를 진행하지 않도록 하고, 한국에는 강제 징용 판결과 관련한 일본 기업의 압류자산 매각을 하지 않는 것을 각각 요청하면서 한미일 3개국이 수출 규제에 대한 협의의 틀을 만드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미국의 진일보한 관여 노력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행보에서도 확인됐다. 2일 개막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 방콕으로 출국한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기내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장관을 각각 만난 뒤 양측을 함께 만나겠다고 밝히며 “우리는 그들(한일)이 전진하는 길을 찾도록 독려(encourage)하겠다”며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을 공식화했다. 한일 갈등 중재와 관련한 질문에 이같이 답한 폼페이오 장관은 “우리가 두 나라 각자를 위해 좋은 지점을 찾도록 도울(help) 수 있다면, 그것은 두 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한일 문제에 관여하고 나선 것은 한일 갈등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자칫 미국이 주력하는 대북 공조와 대중국 견제 전선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블룸버그통신은 한일 양국 정부가 백악관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미국의 반응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미국 전자업계 6개 단체가 최근 한일 양국 정부에 글로벌 공급망 붕괴를 우려하며 사태를 악화시키는 행동을 멈춰달라는 서한을 보낸 데서 보듯 미국 경제계에 미칠 우려도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ARF를 계기로 모이는 한미일 3국의 외교전이 한일 갈등이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지를 가르는 중요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1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시작으로 이틀 동안 한미, 미일,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미국의 관여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선 당장 2일 예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보류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미국의 시그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분쟁 중지 합의를 요청했다는 보도에 대해 “그런 사실이 없다.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다양한 문제에 대해 계속 한국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할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입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해 미국을 상대로 한 로비전을 더욱 강화할 뜻도 시사했다. 우리 외교부 관계자도 “미국과의 소통 내용은 모두 공유하고 있는데 (분쟁 중지 협정 요청 등은)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요청이 있더라도 우리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프로세스이다”고 말했다. 한일이 미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경쟁을 벌이면서 한미일 3자 회담이 미국의 의도와 달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자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용어설명: 분쟁 중지 협정(standstill agreement)- 일종의 ‘불가침협약’을 뜻함. 원래는 기업들이 일정 기간 상호 인수공격에 나서지 않겠다고 맺는 약정을 의미. 국제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양국이 일정 기간 새로운 대항조치를 서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현상 유지’ 협약을 뜻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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