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의전과 갑질

입력
2019.07.27 04:40
22면

 

행사에 신청하지도 않았고, 초대받지도 않았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린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시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의전을 바랐다. ©게티이미지뱅크
행사에 신청하지도 않았고, 초대받지도 않았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린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시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의전을 바랐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지역 공유공간에서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기획한 행사에는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왔고, 행사는 순조롭게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시작 후 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어떤 이가 행사장 주변을 기웃거렸다. 동료는 그에게 행사에 관심이 있는지 물으며 안내 소책자를 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뜸 자신이 ‘시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했다. 행사에 관심 있는 공무원쯤으로 생각한 동료는 행사장에 입장할 것인지 물었으나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갑자기 안내하는 동료에게 공유공간 직원인지, 행사장 아르바이트생인지 무례한 태도로 추궁한 것이다. 행사에 신청하지도 않았고, 초대받지도 않았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른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시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의전을 바랐다. 결국 직원이 나온 후에 실랑이는 일단락되었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 이러한 일은 만연하다.

지역 주민이 이용하는 곳에 갑자기 국회의원이 방문해서 허락 없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어 악수를 청하는가 하면, 지자체장이 도착하니 30분 전부터 “머릿수만 채워달라”, “10분만 시간을 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국회의원 주관으로 열린 토론회는 또 어떤가. 국회의원은 자신이 사람들을 맞이하는 입장이 아니라 ‘바쁜’ 업무 일정에도 불구하고 토론회에 참여한 귀빈의 입장으로 패널과 시민들을 대한다. 지각은 기본이고,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보다 자신의 바쁨을 변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작이 늦더라도 내빈 소개와 축사가 꼭 포함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토론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축사하다가 갑자기 패널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심지어 다그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시작 전 분위기를 흐리고, 국회의원은 토론회 시작 후 10분도 안 돼서 자리를 뜬다.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과 같은 공무원들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시간과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아야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본인들이 출현할 때 모두가 환영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는 보좌관과 관계자들의 세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의전’ 문화에서 나온다. 본디 의전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우하기 위한 외교적 관행이다. 국가적 대리자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통해 관계를 맺고 협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전은 섬세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감수성의 척도에 따라 그 진가를 발휘하여 좋은 성과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권력자들은 의전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의전은 자신은 어떤 위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타인의 시간을 함부로 빼앗을 수 있다고 여기는 ‘갑질’의 형태로 드러난다. 특히 관료적인 조직에서 두드러진다. 경직된 직장문화를 지닌 곳에서 상사와 직원 사이의 관계나 행동을 보면 의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전이 아니라 무례함이자 권력 남용이다. 자리가 높을수록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 자신을 낮춰야 하는데, 자리보다 자신을 더 높이 과시하려는 허영은 과잉 대우를 지속시킨다.

과잉 대우가 심해지면 재난 지역에 방문한 국회의원이 스스로 신발 끈을 묶지 못해 수행원이 묶어주고, 공항에서 자신의 짐가방조차 들지 못해 수행원에게 밀어내는 국회의원이 등장한다. 삶의 기본적인 것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시에서 나왔다’던 불청객 공무원은 행사장 직원이 나오자 그저 목이 마르다는 말만 내뱉었다. 그리고 직원이 가져다준 얼음물을 마시고 사라졌다. 자신의 목마름조차 해소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 어떻게 시민을 위해 일하고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눈앞이 까마득하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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