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문무일, 이현세 찾아가 사과한 사연은

입력
2019.07.04 04:40
수정
2019.07.04 08:38
15면

1997년 만화 ‘천국의 신화’

음란폭력물 제작 혐의 표적수사

단둘이 만나 밤늦도록 통음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역사관에서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지적한 검찰 과오와 관련한 대국민 입장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역사관에서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지적한 검찰 과오와 관련한 대국민 입장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무일 검찰총장이 20여년 전 ‘천국의 신화’ 사건을 두고 만화가 이현세 작가에게 사과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3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문 총장은 2017년 총장 취임 직후, 이 작가를 찾아가 검찰을 대신해 당시 수사에 대해 사과했다.

문 총장은 그간 검찰의 잘못된 과거사에 대해 꾸준히 사과해왔다. 박종철 열사 유족,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 민주화 운동 희생자 유가족 모임 등을 직접 찾아가 사과했고, 24일 퇴임 전 유우성 간첩조작사건 등에 대해 사과할 것도 검토 중이다. 역대 검찰총장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 ‘사과 총장’이란 별명도 생겼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문 총장이 했던 ‘1호 사과’는 따로 있었다.

20년 전이던 1997년, 만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당대 최고의 만화가였던 이현세 작가 작품 ‘천국의 신화’를 두고 검찰이 음란하다며 수사를 벌인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격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천국의 신화’는 대형 SF작품 ‘아마게돈’으로 만화계를 뒤흔들었던 이 작가가 창세기 신화를 다루겠다며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검찰은 여기에 들어간 근친상간 등 일부 자극적 장면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문명 이전 시대를 묘사하려다 상징적으로 들어간 장면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성인본과 별도의 청소년본을 내면서 청소년본에선 삭제했다.

1997년 이현세 작가의 만화 '천국의 신화'를 두고 음란하다는 수사가 진행되자 서울 종로에 모인 만화협회 회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이현세 작가의 만화 '천국의 신화'를 두고 음란하다는 수사가 진행되자 서울 종로에 모인 만화협회 회원들이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검찰은 끝내 이 작가를 음란폭력물제작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학교 내 폭력서클이 사회문제였는데, 이들이 일본 만화에 나오는 ‘일진회’를 흉내 낸 것이란 얘기가 나오자 만화계를 겨냥한 것이었다. 법정 투쟁에 나선 이 작가는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냈다.

하지만 허탈한 승리였다. 이 작가는 소송 스트레스 때문에 작품활동을 한동안 접었고, 은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만화가로서 한창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벌여야 할 40대 시절을, 검찰의 ‘천국의 신화’ 수사 때문에 망쳤다”고, 이 작가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검찰이 이 작가를 기소했던 20여년 전, 문 총장은 평검사였다. 사석에서 이 작가를 만난 적 있던 문 총장은 당시 검찰청과 법원을 드나들던 이 작가의 모습을 보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정부의 ‘만화 사냥’에 동원된 검찰이 한국의 대표적 만화가를 표적 수사한, 부끄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현세
이현세

2017년 7월 취임하면서 검찰의 과오를 바로 잡겠다 선언한 문 총장은 곧바로 이 작가에게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단 둘이 이 작가를 만나 늦은 시간까지 통음하며 사과했다. 이 작가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당시 어렸던 막내 검사가 어느 날 검찰 총수가 돼 검찰을 대표해 사과를 하겠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고마웠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6년 동안의 법정 투쟁으로 너무 큰 피해를 입었고, 영원히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그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도 성숙해졌고, 젊은 작가들이 창작의 자유도 얻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문 총장과 이 작가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작가는 “이후에도 서너 차례 만나면서 문 총장이 검찰에서 겪은 일들을 만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며 “곧 임기가 끝나면 축하 자리를 또 한번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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