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학 칼럼] 평화의 문 여는 열쇠는 ‘만남과 신뢰’

입력
2019.07.01 18:00
30면

판문점 깜짝 회동, 북미 대화 재개 추동

北체제 경직성ㆍ한미 선거 등 변수 여전

‘신뢰 회복’만이 한반도 평화 구축 견인

옛 서독은 정권교체와 관계 없이 일관된 통일정책을 폈다. 한국과 미국은 정권이 바뀌면 대북 정책도 오락가락했다. 북한은 70년 넘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대결하며 생존의 위협을 느껴온 나라다. 그런 공포심이 북한을 핵개발에 매달리게 만든 원인이다. 두려움과 불신에 젖은 북한에게 정상 간 합의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자주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 판문점=류효진 기자
옛 서독은 정권교체와 관계 없이 일관된 통일정책을 폈다. 한국과 미국은 정권이 바뀌면 대북 정책도 오락가락했다. 북한은 70년 넘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대결하며 생존의 위협을 느껴온 나라다. 그런 공포심이 북한을 핵개발에 매달리게 만든 원인이다. 두려움과 불신에 젖은 북한에게 정상 간 합의는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자주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집 앞에서 대화하는 모습. 판문점=류효진 기자

족집게 북한 정보통이라지만 북미 정상의 회동을 점쳤던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 얘기에 반신반의했던 게 사실이다. 오히려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의 전화 통화 예측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북한 매체들이 당일 아침까지도 우리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거친 비난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사대적 근성’ ‘실로 가소로운 일’ 등 대화를 원하는 태도로 믿기 어려운 대응이어서 문 대통령이 중재하는 판문점 회동을 받아들일 리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했다. 마실 다니는 노인이 동네 어귀에서 이웃집 청년과 담소를 나누듯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지구촌 유일한 냉전의 현장인 판문점에서 북한과 미국의 최고지도자가 만나 평화의 악수를 나눈 것이다. 미국 현직 대통령이 적대국가인 북한 땅을 밟은 건 정전 이후 66년 만에 처음이다.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견고한 분단의 장벽이 아니라 노인도 가볍게 넘을 수 있는 이웃집 담장이었다. 판문점 깜짝 회동은 미로를 헤매던 북미 협상 재개를 이끌어 냈다.

물론 섣부른 기대감은 금물이다. 하노이 2차 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북미 간 의견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남북미 정상의 의지만으로 풀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세 나라의 국내 정치적 요인이 언제든 판을 깨뜨릴 위험이 상존한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북한 체제의 경직성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고립된 국가다. 북한이 지금껏 온건한 협상과 미사일 도발 등 강경 대응을 오간 것은 체제유지 전략의 양면이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완벽한 체제 보장이 이뤄져야만 가능하리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는 미국 대선이다. 미 언론은 판문점 회동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이벤트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경제 성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안보 성과가 더해져야 확실한 승리가 보장된다. 트럼프는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이라는 안보 성과를 얻고 싶어한다. 트럼프가 민주당의 견제, 그리고 대중국 봉쇄에 목숨을 거는 군산복합체와 주류 정치세력의 저항을 뚫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세 번째는 북한을 적대시하며 남북관계를 왜곡시켜 온 국내 극우세력의 반발이다. 한반도 평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은 북한 체제 붕괴를 겨냥한 정치 공세로 끊임없이 남북 갈등을 조장해 왔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신뢰하려면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가 지켜질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 야당의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내는 노력을 더 가속화해야 하는 이유다.

북미는 66년간 적대 관계를 이어왔다. ‘선(先)비핵화’와 ‘동시ㆍ단계적 이행’을 놓고 이견을 보이는 것도 양국 간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 속에서 역사적인 판문점 회동이 이뤄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TV로 판문점 회담을 지켜본 뒤 “지난 몇 시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만남의 문화’의 좋은 사례를 보았다. 이같이 중요한 행동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로 가는 길로 한 발짝 더 진전을 이루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북미 실무대화 재개는 꺼져가던 희망을 다시 살려낸 작은 성과일 뿐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북한을 고립시키지 않고 국제사회의 정상국가로 끌어내는 일은 지난한 작업이다. 한반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끊임없이 만나고 설득해야 한다. 트윗 제안 32시간 만에 판문점 회동이 이뤄졌다. 기존 관행을 뛰어넘는 파격과 혁신이다. 이렇듯 자주 만나야 한다. 그래야 북미 간 신뢰도 쌓이는 법이다. 그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지지하도록 견인하는 노력도 요구된다. ‘잦은 만남과 신뢰 회복’만이 한반도 평화의 문을 열 수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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