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아버지 외도로 태어나 불행했던 유년기… 시댁, 친정만 가면 화나고 억울해요

입력
2019.03.04 04:40
수정
2019.03.04 13:49
27면
구독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아버지와 친모의 외도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당시 유부남이었고 친모는 미혼이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다시 아내에게 돌아갔고, 저는 열두 살, 여덟 살 많은 이복형제와 함께 살게 됐습니다. 친모와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가끔 만난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놀이공원에 같이 간 기억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또 다른 여성과 외도하여 아내와 결국 이혼하고, 재혼했어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새어머니와 새어머니가 데려온 딸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가족이 수 차례 바뀌었지만, 저는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는 매우 다정하고, 애정표현도 자주 하셨어요. 어릴 때 저는 말썽을 많이 피우고 못된 아이였대요. 밤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갔고, 그러다 혼날까 무서워서 도망간 기억도 많아요. 한번은 집 앞에 제 교과서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저 역시 그 교과서처럼 언젠가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았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는 택시기사였고, 아버지의 전처는 공장에서 일을 했어요. 가난했지만 아버지의 전처는 먹을 것도 주고, 공장에 데려가기도 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외도로 낳은 자식을 키운다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어요. 집안 분위기는 그래서 늘 우울했어요.

아버지가 재혼한 이후에도 힘들었던 기억뿐입니다. 새어머니는 동전을 제 얼굴에 던지며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렇게 비참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어요. 아버지도 변했어요. 일주일 내내 술에 취해 있었고, 새어머니를 때리고, 딸들에게도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고, 폭언을 퍼부었어요. 새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고, 그런 모든 스트레스를 제 탓으로 돌렸어요. 저도 중학생 때부터 반항을 심하게 했어요. 새어머니와 이부언니를 격렬하게 증오했어요. 저는 20대가 돼서도 계속 방황했어요. 대학도 못 가고 어떻게 하면 죽을까, 살아갈 수는 있을까 등 온갖 고민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고 싶었지만 먼저 다가가기에는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 제가 불쌍하면서도 혐오스러웠어요. 친구와도 오랜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고, 늘 외로웠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그래서 강아지를 한 마리 길렀고, 일절 밖에 나가지도 않고 만화책과 TV만 끼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강아지에게 과자를 던졌고, 크게 싸운 뒤 그 길로 가출했어요. 자살할 용기는 없어 친구를 찾았고, 다행히 친구가 저를 도와줘 3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구와 함께 지냈습니다. 고졸에 판매직만 전전하다 결국은 아버지에게 다시 연락해 20대 중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습니다. 다녀와서 전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저를 남편은 따뜻하게 보듬어주었어요.

결혼하면서 제 유년 시절과는 결별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명절에 시부모님이 시누이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만 봐도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있는 친정에 가도 울화가 치밉니다. 이부언니는 대학도 보내주고, 결혼할 때도 도와줬는데, 저한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그들이 미워서요. 앞으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싶은데, 이런 감정들 때문에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억울합니다. 심할 때는 죽고 싶기도 해요.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허은혜(가명ㆍ36ㆍ회사원)


은혜씨, 당신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에 충분히 공감이 돼요. 당신이 옆에 있다면 아마 어스러질 정도로 꽉 안아줬을 거에요. 당신이 너무나 이해되고, 그래서 당신이 너무 안쓰러워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하지만 당신이 힘들게 버텨온 유년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대학에 가서 남편을 만나고 결혼한 그 이후부터 당신의 시간은 새롭게 시작됐어요. 그 이후부터 당신은 현명하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당신이 행복하게 살아갈 시간이 훨씬 많이 남아 있어요.

당신이 호주에 다녀와 어느 정도 삶에 안정을 찾은 그 시점 이전에 당신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을 거에요.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이었지요. 어린 당신은 어디에 가서 살지 몰라 늘 불안했고, 언제든 버려질까 두려웠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었어요. 당신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생존을 위협받았지요.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받은 상처는 누구도 쉽게 회복하지 못할 만큼 깊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대학에 가고,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삶을 일궜어요. 새로운 가정이 생겼고, 편안하게 지낼 집도 있고,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왜 당신은 여전히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고통스럽고, 화가 나는 걸까요.

당신이 안정된 삶을 찾기 이전을 한번 살펴볼게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축복받을 권리가 있어요. 부모가 누구든, 어떠한 상태이든, 출생은 고귀하고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에요. 그런데 은혜씨는 그렇질 못했어요. 다섯 살 때까지 친모가 함께 했지만 아마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떳떳하지 못하고 불안정했을 거에요. 그런 당신을 두고 친모가 떠난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었어요.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새 가정에 가게 됐더라도 친모는 틈틈이 당신을 찾아왔어야 했어요. 그때 친모와의 완전히 단절된 기억으로 당신은 조금이라도 단절된 느낌이 들면, 두려워지고, 스스로 위축되고,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죽고 싶도록 괴로워져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아버지의 전처도 당신에게 철저히 무심했어요. 친모로부터 단절을 경험한 당신은 새 가정에서 다시 한번 완전한 단절에 좌절했을 거에요. 아버지의 전처는 당신을 학대하진 않았지만 따뜻하게 받아주지도 못했어요. 그의 냉담이 당신에겐 치명적이었을 거에요. 이때 경험한 단절과 냉담 때문에 지금도 당신은 상대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당신을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거나 당신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고,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괴로워져요. 이 느낌은 지금처럼 당신이 전혀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신을 괴롭혀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새어머니는 당신을 학대했어요. 아버지의 전처는 냉랭하게 대했지만, 일하러 갈 때 당신을 데려가는 등 아주 조금의 책임감이 있었지요. 하지만 새어머니는 당신을 무시하고, 모멸하고, 모욕하고, 폭력적으로 대했어요. 당신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학대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이 의지할 곳은 아버지였던 것 같아요. 썩은 동아줄 같은 아버지에게 매달렸어요. 아버지는 당신을 보호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어요. 강아지 사건으로 당신도 그걸 깨닫고 아버지를 떠났지요.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은혜씨는 그걸 해냈어요. 그건 내면의 힘이에요. 당신에게 그런 긍정적이고 현명한 힘이 있어요.

은혜씨,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당신을 모질게 대했기 때문에 당신은 지금도 안정된 친근감을 갖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까’라는 단단한 믿음이 없어요.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믿음이 있으면 안정이 되지요. 그런데 은혜씨는 이런 믿음이 형성돼 있지 않아요. 직접적인 표현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당신의 마음은 편안해지지만, 그런 표현이 없을 땐 흔들리고 말죠.

제가 보기에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주 좋은 사람 같아요. 은혜씨를 넉넉히 포용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은혜씨는 남편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사람이고, 자신을 많이 사랑해줄 거라는 믿음이 단단하지는 않지만 그 믿음과 신뢰의 뿌리가 형성은 되어 있을 거에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대상이지요. 그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남편과 함께 은혜씨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단 얘깁니다.

은혜씨가 주위 사람들에게 받는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을 남편한테만큼은 솔직하고 편안하게 말해보세요. 때로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도 괜찮습니다. 남편은 그런 은혜씨를 받아줄 만큼 단단한 분일 거예요. 그런 과정을 당분간 겪어야 은혜씨 마음에 ‘아 이 특별한 사람은 나를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화를 내도 그것을 받아주고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는구나’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물론,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그런 과정이,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까지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남편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예요. 그 외 시부모님이나 시누이나, 새어머니, 심지어 아버지도 당신의 인생에 앞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할 존재들이에요. 그러니 서로 건드리지 않으면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명절에 가족들을 보면 화가 치미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종종 겪는 일이죠. 그런데 은혜씨는 어렸을 적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강요를 당해왔고, 늘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서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여전히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나한테 요구하지, 나는 이걸 왜 다 받아주고 참아줘야 해’라는 생각이 들고, 화가 나는 거에요. 저는 당신에게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있는 집에 굳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힘들면 보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명절에 시댁에 잠깐 들렀다가 아버지에게 가지 말고, 남편이랑 영화도 보고 외식도 하세요. 은혜씨가 하고 싶은 대로요. 아버지는 원한다면 따로 만나세요. 아버지가 마음의 고향인 거지, 새어머니가 있는 집이 당신의 고향이 아닙니다.

원한다면 아이를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은혜씨가 부모가 주는 기본적인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되는 게 두려울 수도 있어요. 아이를 낳으면 누구나 걱정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아요. 그런데 당신은 이제껏 스스로를 위해, 혹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용기를 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어요. 그런 힘으로 분명히 사랑과 보호를 기본으로 하는 부모의 사랑을 아이에게 줄 수 있을 거예요. 자식만큼 가까운 관계도 없고, 그런 존재도 없어요. 나는 당신이 그런 경험을 해보고, 기회를 가져봤음 좋겠어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내려받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