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여자 선수 223명, 여자 코치 0명… 남성중심 권력구조가 성폭력 키워

입력
2019.01.13 17:27

체육계 성폭력은 구조적 문제… 외부와 단절된 합숙 시스템도 그대로

자유한국당 염동열,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바른미래당 김수민, 민주평화당 최경환 의원이 지난 10일 국회 정론관에서 체육계 성폭행·폭행 OUT! '운동선수 보호법(심석희법)발의'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력에 시달렸다는 심석희(22)의 충격적인 폭로가 나온 뒤 정부와 대한체육회, 빙상경기연맹이 각종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사후약방문‘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스포츠 성폭력은 체육계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 감독이 선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권력관계와 전근대적인 합숙 시스템이 더해져 나온 결과물인데 관계 기관은 근본 원인을 고칠 생각 없이 실효성 없는 대책만 반복해서 내놓고 있다.

◇여성 지도자 절대적 부족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2018년에 등록된 전국 남녀 지도자는 총 1만9,965명, 그 중 여자지도자는 3,571명(17.9%)에 불과했다. 같은 해 선수로 등록된 13만5,637명 중 여자는 3만1,572명(23.3%)으로 여자선수에 비해 여자지도자가 현저히 부족한 셈이다. 초등부에서 대학부로 갈수록, 또 더 많은 연봉과 권력을 가진 실업ㆍ프로팀으로 갈수록 여자지도자의 부재는 더욱 심화됐다.

논란의 빙상연맹의 경우 체조협회와 유이하게 여자선수가 남자선수보다 더 많았음에도 불균형은 심각했다. 특히 심석희가 소속된 쇼트트랙에서 여자선수는 223명이지만 여자지도자는 전무했다. 골프는 여자선수가 1,015명(47.8%)으로 절반에 달했지만 여자지도자는 14명(10%)에 불과했다.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인 임신자 경희대 교수는 “형식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보다 쿼터제 등을 통해 여자지도자가 역량을 발휘할 생태계를 만들어야 여자선수에 대한 폭력도 줄어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 인력 풀 자체가 부족하다는 체육계의 항변이 있지만 임 교수는 “한국의 사회구조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체육계는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이기 때문에 여성지도자들이 기량이나 능력을 발휘할 수도, 또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도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절대적 위계ㆍ합숙문화 화 키워

폐쇄적인 합숙 시스템도 성폭력을 부채질한 원인이다. 2016년에는 국가대표선수촌 여자 수영 선수들의 탈의실에서 ‘몰래 카메라’가 설치됐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파문이 일었다. 2018년 9월에는 여자 배구 대표팀의 코치가 선수촌 내에서 술을 마신 뒤 트레이너를 성추행 한 사건도 발생했다. 몰입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외부와 단절된 격리 합숙을 고집해 온 태릉ㆍ진천선수촌이 사실상 성폭력을 방조한 도구로 전락한 셈이다. 대한체육회는 지난 10일 선수촌 내 훈련장과 경기장에 인권보호를 위한 CCTV를 설치하고 라커룸에도 비상벨을 다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체육계에 뿌리 깊은 선수ㆍ지도자 간의 위계는 폭력ㆍ성폭력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지도자가 진학과 프로진출, 국가대표 선발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에선 선수들은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허현미 체육시민연대 공동대표는 "폭력이나 성폭력 등은 선수와 지도자 간의 전형적인 권력구조에서 이뤄지는 특징이 있다. 또 그 구조 때문에 은폐돼왔다"고 분석했다. 스포츠 관련 자문을 맡고 있는 법무법인 에이펙스의 장달영 변호사는 “성적만능주의에 따른 강압적인 지도 방식은 예전부터 내려온 문제”라며 “많은 스포츠인들이 지도자와 선수, 선배와 후배 간 위계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위해선 물리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성폭력 조사 때마다 대안 내놨지만

10여 년 전과 최근의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를 비교해보면 한국 체육에서 성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 매 보고서마다 원인 파악과 대안을 제시했지만 관계 기관들은 근본 원인을 바꿀 생각은 없이 효과 없는 엇비슷한 대책만 반복할 뿐이다.

2007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수행한 ‘프로스포츠 팀과 직장운동부의 여성선수 권익실태 조사’에 따르면 설문 대상 선수 2,254명 가운데 16.1%가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발생 장소는 훈련장이 55.8%로 가장 높았고 회식자리 등 공개된 장소(26.9%), 합숙소(17.3%), 전지훈련 숙소(11.5%) 등의 순이었다. 성폭력 가해자는 코치(44.2%)와 감독(38.5%)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감독보다 선수들과 접촉 빈도가 높은 코치들에 의한 성폭력이 더 많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보고서는 코치가 선수에게 성적 요구를 거절하면 선수 생활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일회성이 아닌 반복적으로 성폭력이 가해졌고 선수들이 피해 사실을 알려도 실질적 조치가 더디게 진행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가해자가 징계 뿐 아니라 법적 처벌을 받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고 가해자가 속한 기관에도 책임을 물어야 하며 성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는 합숙소의 운영 기간을 최소화하고 장기적으로 합숙소를 폐지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07년 여자 프로농구 팀에서 감독이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 체육계에서 처음 이뤄진 실태 조사였다. 이후 대한체육회는 2010년부터 2년 주기로 꾸준히 조사를 하며 보고서를 내고 있다.

가장 최근인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 조사’를 보면 성폭력 피해 경험은 일반 선수(초ㆍ중ㆍ고ㆍ대학ㆍ실업 소속)의 경우 3%, 국가대표 선수는 1.7%로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지도자들에 의해 숙소와 훈련장에서 성폭력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성폭력 가해자는 일반 선수의 경우 성희롱과 성추행 모두 지도자(11.4%, 11.8%)보다 선배(47%, 22%) 비율이 높은 경향을 보였지만 강간은 지도자가 40%를 차지했다. 국가대표도 성희롱 가해자는 절반 이상인 53.8%가 지도자로 선배(23.1%)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고 성추행 가해자는 100% 지도자였다. 이 보고서는 훈련장과 경기장, 숙소 등 특정 지역에서 성폭력이 많이 발생하는 만큼 CCTV 등을 설치해 사각지대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개선안을 내놓고 있다.

2007년 연구책임자로 실태 조사를 진행했던 황정임 여성정책연구원 성평등정책확산전략실장은 “지도자가 절대 권력을 쥔 기본 구조부터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성폭력 예방 방법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성환희 기자 hhsung@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서진석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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