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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때 비유를 풍성하게 하는 방법 배운 후 책이 달라 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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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이에 놓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자세는 꼿꼿했다. 나는 자꾸 그녀에게로 휘었다. 척추인지 마음인지 그녀에게로 쏠렸던 내 자세를 기분 좋게 들키다가 집에 와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어봤다. 내려 긋는 한 획의 기본 자세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몸을 쓰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기분 좋은 백전백패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민정(민정)= “죄송하게도 제가 발레를 잘 몰라서요. 공연 몇 번 본 게 단데 지영씨 공연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네요. 새 공연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그땐 꼭 볼게요.”
김지영(지영)= “아휴, 괜찮아요. 지금 ‘마타 하리’를 준비하고 있고요,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전당에서 해요. 1993년에 초연이 되었던 작품인데 그때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가 국립발레단을 위해 새 버전을 준비해주고 있어요. 25년이나 지난 세월에 맞게요.”
민정= “공연 이렇게 앞두고 있으면 책 보고 그러기 힘들겠어요.”
지영= “집중해서는 많이 못 보죠. 이번 공연이 마타 하리 얘기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파울로코엘료가 쓴 마타 하리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스파이’라고요. 그래서 그 한 권은 다 읽었어요. 안무가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공연도 과거를 회상하는 식의 전개가 이어지는데 책도 비슷해서 빠져들어 읽었어요. 재밌더라고요.”
민정= “특별히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었을까요?”
지영= “예원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매주 수요일마다 글짓기를 해서 발표하게 시키셨어요. 주제요? 아무 것이나 다요. 그때 얼마나 쓰기가 싫었겠어요. 정말 이런 걸 왜 시키시나 그랬는데 예컨대 제가 그녀는 예뻤다, 라고 써가면 선생님이 꽃처럼 예뻤다, 인형처럼 예뻤다, 이렇게 비유로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막 상상력을 자극하게요. 이후부터는 책이 좀 다르게 읽히더라고요.”
민정= “하여간에 일찍부터 발레는 엄청 최고로 잘했던 아이였던 거 맞죠? 중학교 3학년 때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학교로 유학을 갔단 말이죠.”
지영= “잘하긴 했죠(웃음). 장점이요? 저는 잘 보고 잘 배우고 잘 따라 했던 것 같아요. 포인트를 잘 집어냈던 것 같아요. 아무튼 당시는 우리가 러시아와 수교를 맺기 전이라 정말 발레도 철의 장막이었는데 수교 이후에는 볼쇼이발레단 다큐멘터리도 볼 수 있었고 초청도 막 이뤄지고 그랬어요. 그러다 제가 6학년 때 바가노바 발레 학교 선생님과 일주일간 워크숍을 했는데요, 그때 나 무조건 그 학교 갈 거야, 꿈을 꾸게 되었죠.”
민정= “아주 이른 나이에 인생의 목적지를 결정하게 되는 거잖아요. 몸을 쓰는 일이 업인 분들은 다 그렇겠지만 너무 두려울 것 같아요.”
지영= “유학 가기 전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러시아를 다녀오긴 했었어요. 러시아의 현실, 이를테면 안 맞는 음식도 그렇고 뜨거운 물 잘 안 나오는 시설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편한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죠. 내 꿈이 더 컸으니까요. 그런데 가서는 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발레가 100일 수는 없잖아요. 또 막상 가니까 나 같은 애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도 국내에서는 잘 한다 잘 한다 콩쿠르 나가면 1, 2등 하고 신체도 그 당시만 해도 저 같은 체형이 많지 않았던 땐데 러시아에는 저 같은 사람이요? 세고 세더라고요. 넘치고 넘쳐나더라고요. 그때 매일같이 일기를 썼어요.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너무 괴로워가지고 죽고 싶다는 말만 매일 쓴 것 같아요. 러시아에 가면 다 잘 될 줄 알았거든요. 내가 생각한 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살도 찌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지냈던 것 같아요.”
민정= “러시아로 유학을 떠날 때 들고 간 책, 혹시 기억나세요?”
지영= “아뇨 그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챙기려고 했던 책은 기억나요. 만화책이요(웃음). 어렸을 때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갈채’ ‘르네상스’는 기본이고 온갖 순정만화 다 끼고 살았어요. 언니가 저보다 여덟 살이 많은데요, 언니가 만화를 진짜 좋아했는데 그 영향을 너무 받은 거죠. 신일숙 선생님, 김영숙 선생님 완전 팬이었거든요.”
민정= “추억의 이름이 다 불려 나오네요.”
지영= “웃긴 게요, 중학교 들어가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보고 너무 좋아서 10권짜리 소설을 빌려 보게 되었거든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제가 좋아했던 최대치가 소설 속에서는 악마인 거예요. 원작과 드라마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솔직히 감정적으로 저한테 좋은 기억을 남긴 건 아닌데 제가 간절히 찾아서 보게 된 첫 책이라 기억이 선명해요.”
민정= “유학 내내 아무래도 우리말로 된 읽을거리가 간절하긴 했겠어요.”
지영= “그때 엄마가 책을 많이 보내주셨어요. 무슨 풍수지리에 관한 책도 있었고,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토정비결’도 있었어요. 엄마가 재미 삼아 사주 푸는 걸 공부하고 있던 때여서 보내준 책이 그랬나 본데 어린 마음에 묘를 어떻게 써야 한다, 묘를 어떻게 쓰니 집안이 잘 되더라 하는 얘기들이 엄청 재미나게 읽히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학교에 선배 언니가 두 명 더 있었는데 활자가 너무 소중한 나머지 서로 갖고 있는 책을 교환해서 보고 그랬어요.”
민정= “어머니 얘기를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좋아하는 지영씨에게 너무나 드라마틱한 일이었잖아요.”
지영= “그렇죠. 제 졸업 공연 보러 러시아 오셨다가 객석에서 공연 도중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니까요. 공연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병원에 당장 가보라는 거예요. 무슨 별일이겠나 싶어 인사 다 끝나고 가겠다고 그랬더니 지금 당장 가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이미 엄마가 사망 신고를 받은 뒤였더라고요. 아무튼 저는 마지막 인사 못한 것 때문에 투덜대면서 갔다고요. 병원 응급실 도착하니까 의사들이 죽었다, 뭐 이런 맥락의 말을 해요. 당황해가지고 쫓아 들어갔죠.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우리 엄마가 죽은 거예요. 난리도 아니었죠. 다행히 제 졸업이라고 한국에서 오빠만 빼고 우리 집 식구들 전부가 다 왔고요, 지영이 졸업이라는데 여행도 할 겸 공연도 보자 해서 엄마 친구들이 여행사 끼고 단체로 10명 넘게 우르르 오셨었어요. 우리 엄마는 어떻게 보면 되게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어요. 거기서 장례식 다 했거든요. 화장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관은 그렇게 안 생겼지만 외국은 투명해서 안이 다 보이잖아요. 우리 엄마 나 공연 본다고 핑크색 한복 입고 왔는데 그거 입은 채 온갖 꽃에 싸여서 관 속에 누워 있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민정=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영= “미친 듯이 잠만 잤던 것 같아요. 얼마간의 시간은. 그렇게 잠이 쏟아지더라고요.”
민정= “유학 생활 4년 하고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잖아요.”
지영= “그렇게 벌써 21년째네요. 물론 2002년부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외유를 다녀오긴 했지만요. 맞다, 유럽 행을 결정할 때 결정타가 되어준 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란 책이었어요. 그거 보니까 가야만 하겠대요.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요? 음…. 저는 사실 국립발레단 입단하고부터 주역만 했었어요. 군무, 이걸 잘 몰랐어요. 그랬어요, 그랬는데,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히 군무를 더 많이 했겠죠(웃음)? 근데 이게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거예요. 주역은 내가 틀리면 나 혼자의 실수로 끝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군무는 나 혼자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압박감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저희한테는 음악이 큐 사인인데 사람이 너무 긴장하다 보면 잘못 들을 수도 있고 하니 이게 미치겠는 거예요. 솔직히 내가 많이 달라져서 들어온 건 맞아요.”
민정= “달라짐의 계기에 책이 놓여 있었다니 그거 무지 반갑네요, 기습적으로 묻는 건데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책이 있을까요?”
지영= “지금이요? 요즘 부쩍 기억이 흐려져서 아 잠시만요…. 음, ‘오만과 편견’도 있고, ‘검은 꽃’도 있고. 전 소설만 읽고는 김영하 작가가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그리고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요. 나 그 책 너무너무 좋아해요. 시끄럽지 않게 잔잔하게 여러 감정으로 말을 걸어주는 책이거든요. 군더더기가 없고 세련되고 하여튼 선물로도 가장 많이 한 책이었어요. 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요. 작품마다 선호가 분명한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완전 뿅 가겠더라고요. 어떤 느낌이냐면 제가 최근에야 ‘타짜’를 봤거든요. 십여 년 전 영화잖아요. 그런데 촌스러운 맛이 있으면서도 뭐랄까 세련됨보다도 어떤 찐함 같은 거요, 터프함 같은 게 완벽한 느낌을 주는 거예요. 또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 생각나네요. 제목이 늘 제게 춤으로 오거든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발레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춤을 훨씬 더 잘 출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전 정말 춤을 잘 추고 싶거든요. 춤을 잘 추고 싶고 춤을 많이 추고 싶은데 점점 어려워요.”
민정= “아이고 욕심쟁이! 그 춤의 끝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저도 점점 문장쓰기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가장 어려운 게 글쎄 조사 은, 는, 이, 가, 더라고요. 그러니까 기본기라는 거요.”
지영= “맞아요. 저도 요즘 똑바로 서는 게 가장 어렵구나, 그래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육체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없어지고 밸런스가 틀어지고 순발력도 떨어지고 이렇게 약해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또 계속 아프죠. 몸을 많이 썼으니까 아플 거 아니에요. 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해요. 발레를 가르칠 때 에너지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단 제가 잘 춰야 해요. 흔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나하고의 싸움이 가장 안 힘들다고 생각해요.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해요. 나하고의 싸움은 누가 방해할 수도 없고 내가 잘 싸우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잖아요. 남과의 싸움은 내가 잘 싸워도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틀어질 수 있잖아요. 나는 나와의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같이 나와 싸워요.”
민정= “공연 준비로 바쁠 테지만 요 근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요.”
지영= “그거는 봤어요. ‘82년생 김지영’이요. 김지영이라는데 어떻게 김지영이 안 봐요(웃음). 온전히 제목만 보고 사서 술술 읽었고요, 지금은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이랑 시리즈 ‘고전 결박을 풀다’랑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있어요. 비교적 책은 빨리 읽는 편이에요. 그리고 중간까지는 훅 보다가 꼭 결말을 먼저 봐요.”
민정= “지영씨에게 있어 발레를 대체할 만한 뭔가가 있기는 할까요?”
지영=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이 없어요. 너무 다여서요. 예전에 어떤 일본 잡지에서 인터뷰를 할 때 그걸 물어서 제가 발레는 엄마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렸을 적에는 엄마가 전부잖아요. 그러다가 사춘기 지나서 엄마랑 싸우기도 하면서 그 누구보다 원수가 되기도 하잖아요. 그러다가 시집가고 엄마가 되기도 하면서 그 누구보다 모든 걸 이해해주는 친한 친구가 되잖아요.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발레는 엄마가 아닌가 하고요.”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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