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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때 비유를 풍성하게 하는 방법 배운 후 책이 달라 보였죠"

입력
2018.09.21 04:40
22면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10월 무대에 오르는 '마타 하리'를 연습하느라 바쁜 와중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단다. "김지영이라는데 어떻게 김지영이 안 봐요(웃음)." 홍인기 기자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10월 무대에 오르는 '마타 하리'를 연습하느라 바쁜 와중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단다. "김지영이라는데 어떻게 김지영이 안 봐요(웃음)." 홍인기 기자

책을 사이에 놓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자세는 꼿꼿했다. 나는 자꾸 그녀에게로 휘었다. 척추인지 마음인지 그녀에게로 쏠렸던 내 자세를 기분 좋게 들키다가 집에 와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어봤다. 내려 긋는 한 획의 기본 자세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몸을 쓰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렇듯 기분 좋은 백전백패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민정(민정)= “죄송하게도 제가 발레를 잘 몰라서요. 공연 몇 번 본 게 단데 지영씨 공연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네요. 새 공연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그땐 꼭 볼게요.” 

김지영(지영)= “아휴, 괜찮아요. 지금 ‘마타 하리’를 준비하고 있고요,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전당에서 해요. 1993년에 초연이 되었던 작품인데 그때 안무가 레나토 자넬라가 국립발레단을 위해 새 버전을 준비해주고 있어요. 25년이나 지난 세월에 맞게요.”

 민정= “공연 이렇게 앞두고 있으면 책 보고 그러기 힘들겠어요.” 

지영= “집중해서는 많이 못 보죠. 이번 공연이 마타 하리 얘기잖아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파울로코엘료가 쓴 마타 하리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스파이’라고요. 그래서 그 한 권은 다 읽었어요. 안무가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공연도 과거를 회상하는 식의 전개가 이어지는데 책도 비슷해서 빠져들어 읽었어요. 재밌더라고요.”

 민정= “특별히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어떤 계기라도 있었을까요?” 

지영= “예원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매주 수요일마다 글짓기를 해서 발표하게 시키셨어요. 주제요? 아무 것이나 다요. 그때 얼마나 쓰기가 싫었겠어요. 정말 이런 걸 왜 시키시나 그랬는데 예컨대 제가 그녀는 예뻤다, 라고 써가면 선생님이 꽃처럼 예뻤다, 인형처럼 예뻤다, 이렇게 비유로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막 상상력을 자극하게요. 이후부터는 책이 좀 다르게 읽히더라고요.”

 민정= “하여간에 일찍부터 발레는 엄청 최고로 잘했던 아이였던 거 맞죠? 중학교 3학년 때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 학교로 유학을 갔단 말이죠.” 

지영= “잘하긴 했죠(웃음). 장점이요? 저는 잘 보고 잘 배우고 잘 따라 했던 것 같아요. 포인트를 잘 집어냈던 것 같아요. 아무튼 당시는 우리가 러시아와 수교를 맺기 전이라 정말 발레도 철의 장막이었는데 수교 이후에는 볼쇼이발레단 다큐멘터리도 볼 수 있었고 초청도 막 이뤄지고 그랬어요. 그러다 제가 6학년 때 바가노바 발레 학교 선생님과 일주일간 워크숍을 했는데요, 그때 나 무조건 그 학교 갈 거야, 꿈을 꾸게 되었죠.”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김민정 시인이 만났다. 김지영은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책’ 중 하나로 꼽았다. “책 제목이 늘 춤으로 와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발레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 정말 춤을 잘 추고 싶거든요.” 홍인기 기자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김민정 시인이 만났다. 김지영은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책’ 중 하나로 꼽았다. “책 제목이 늘 춤으로 와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발레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전 정말 춤을 잘 추고 싶거든요.” 홍인기 기자

 민정= “아주 이른 나이에 인생의 목적지를 결정하게 되는 거잖아요. 몸을 쓰는 일이 업인 분들은 다 그렇겠지만 너무 두려울 것 같아요.” 

지영= “유학 가기 전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 러시아를 다녀오긴 했었어요. 러시아의 현실, 이를테면 안 맞는 음식도 그렇고 뜨거운 물 잘 안 나오는 시설도 그렇고 여러모로 불편한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죠. 내 꿈이 더 컸으니까요. 그런데 가서는 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발레가 100일 수는 없잖아요. 또 막상 가니까 나 같은 애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도 국내에서는 잘 한다 잘 한다 콩쿠르 나가면 1, 2등 하고 신체도 그 당시만 해도 저 같은 체형이 많지 않았던 땐데 러시아에는 저 같은 사람이요? 세고 세더라고요. 넘치고 넘쳐나더라고요. 그때 매일같이 일기를 썼어요.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너무 괴로워가지고 죽고 싶다는 말만 매일 쓴 것 같아요. 러시아에 가면 다 잘 될 줄 알았거든요. 내가 생각한 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살도 찌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지냈던 것 같아요.”

 민정= “러시아로 유학을 떠날 때 들고 간 책, 혹시 기억나세요?” 

지영= “아뇨 그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챙기려고 했던 책은 기억나요. 만화책이요(웃음). 어렸을 때 만화를 엄청 좋아했어요.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갈채’ ‘르네상스’는 기본이고 온갖 순정만화 다 끼고 살았어요. 언니가 저보다 여덟 살이 많은데요, 언니가 만화를 진짜 좋아했는데 그 영향을 너무 받은 거죠. 신일숙 선생님, 김영숙 선생님 완전 팬이었거든요.”

 민정= “추억의 이름이 다 불려 나오네요.” 

지영= “웃긴 게요, 중학교 들어가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보고 너무 좋아서 10권짜리 소설을 빌려 보게 되었거든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제가 좋아했던 최대치가 소설 속에서는 악마인 거예요. 원작과 드라마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솔직히 감정적으로 저한테 좋은 기억을 남긴 건 아닌데 제가 간절히 찾아서 보게 된 첫 책이라 기억이 선명해요.”

 민정= “유학 내내 아무래도 우리말로 된 읽을거리가 간절하긴 했겠어요.” 

지영= “그때 엄마가 책을 많이 보내주셨어요. 무슨 풍수지리에 관한 책도 있었고,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토정비결’도 있었어요. 엄마가 재미 삼아 사주 푸는 걸 공부하고 있던 때여서 보내준 책이 그랬나 본데 어린 마음에 묘를 어떻게 써야 한다, 묘를 어떻게 쓰니 집안이 잘 되더라 하는 얘기들이 엄청 재미나게 읽히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학교에 선배 언니가 두 명 더 있었는데 활자가 너무 소중한 나머지 서로 갖고 있는 책을 교환해서 보고 그랬어요.”

김지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완전 뿅가겠는" 책이라 불렀다. 홍인기 기자
김지영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완전 뿅가겠는" 책이라 불렀다. 홍인기 기자

 민정= “어머니 얘기를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좋아하는 지영씨에게 너무나 드라마틱한 일이었잖아요.” 

지영= “그렇죠. 제 졸업 공연 보러 러시아 오셨다가 객석에서 공연 도중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니까요. 공연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병원에 당장 가보라는 거예요. 무슨 별일이겠나 싶어 인사 다 끝나고 가겠다고 그랬더니 지금 당장 가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이미 엄마가 사망 신고를 받은 뒤였더라고요. 아무튼 저는 마지막 인사 못한 것 때문에 투덜대면서 갔다고요. 병원 응급실 도착하니까 의사들이 죽었다, 뭐 이런 맥락의 말을 해요. 당황해가지고 쫓아 들어갔죠.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우리 엄마가 죽은 거예요. 난리도 아니었죠. 다행히 제 졸업이라고 한국에서 오빠만 빼고 우리 집 식구들 전부가 다 왔고요, 지영이 졸업이라는데 여행도 할 겸 공연도 보자 해서 엄마 친구들이 여행사 끼고 단체로 10명 넘게 우르르 오셨었어요. 우리 엄마는 어떻게 보면 되게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어요. 거기서 장례식 다 했거든요. 화장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관은 그렇게 안 생겼지만 외국은 투명해서 안이 다 보이잖아요. 우리 엄마 나 공연 본다고 핑크색 한복 입고 왔는데 그거 입은 채 온갖 꽃에 싸여서 관 속에 누워 있었어요. 진짜 예뻤어요.”

 민정=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지영= “미친 듯이 잠만 잤던 것 같아요. 얼마간의 시간은. 그렇게 잠이 쏟아지더라고요.”

 민정= “유학 생활 4년 하고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잖아요.” 

지영= “그렇게 벌써 21년째네요. 물론 2002년부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외유를 다녀오긴 했지만요. 맞다, 유럽 행을 결정할 때 결정타가 되어준 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란 책이었어요. 그거 보니까 가야만 하겠대요.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요? 음…. 저는 사실 국립발레단 입단하고부터 주역만 했었어요. 군무, 이걸 잘 몰랐어요. 그랬어요, 그랬는데, 네덜란드에서는 당연히 군무를 더 많이 했겠죠(웃음)? 근데 이게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거예요. 주역은 내가 틀리면 나 혼자의 실수로 끝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군무는 나 혼자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압박감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저희한테는 음악이 큐 사인인데 사람이 너무 긴장하다 보면 잘못 들을 수도 있고 하니 이게 미치겠는 거예요. 솔직히 내가 많이 달라져서 들어온 건 맞아요.”

 민정= “달라짐의 계기에 책이 놓여 있었다니 그거 무지 반갑네요, 기습적으로 묻는 건데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책이 있을까요?” 

지영= “지금이요? 요즘 부쩍 기억이 흐려져서 아 잠시만요…. 음, ‘오만과 편견’도 있고, ‘검은 꽃’도 있고. 전 소설만 읽고는 김영하 작가가 여자인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그리고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요. 나 그 책 너무너무 좋아해요. 시끄럽지 않게 잔잔하게 여러 감정으로 말을 걸어주는 책이거든요. 군더더기가 없고 세련되고 하여튼 선물로도 가장 많이 한 책이었어요. 아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요. 작품마다 선호가 분명한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완전 뿅 가겠더라고요. 어떤 느낌이냐면 제가 최근에야 ‘타짜’를 봤거든요. 십여 년 전 영화잖아요. 그런데 촌스러운 맛이 있으면서도 뭐랄까 세련됨보다도 어떤 찐함 같은 거요, 터프함 같은 게 완벽한 느낌을 주는 거예요. 또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 생각나네요. 제목이 늘 제게 춤으로 오거든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발레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춤을 훨씬 더 잘 출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전 정말 춤을 잘 추고 싶거든요. 춤을 잘 추고 싶고 춤을 많이 추고 싶은데 점점 어려워요.”

"나는 나와의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같이 나와 싸워요."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21년째 활동하고 있는 김지영의 얘기다. 홍인기 기자
"나는 나와의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같이 나와 싸워요." 최연소로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21년째 활동하고 있는 김지영의 얘기다. 홍인기 기자

 민정= “아이고 욕심쟁이! 그 춤의 끝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저도 점점 문장쓰기에 두려움을 느끼는데 가장 어려운 게 글쎄 조사 은, 는, 이, 가, 더라고요. 그러니까 기본기라는 거요.” 

지영= “맞아요. 저도 요즘 똑바로 서는 게 가장 어렵구나, 그래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육체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없어지고 밸런스가 틀어지고 순발력도 떨어지고 이렇게 약해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또 계속 아프죠. 몸을 많이 썼으니까 아플 거 아니에요. 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해요. 발레를 가르칠 때 에너지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단 제가 잘 춰야 해요. 흔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나하고의 싸움이 가장 안 힘들다고 생각해요.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해요. 나하고의 싸움은 누가 방해할 수도 없고 내가 잘 싸우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잖아요. 남과의 싸움은 내가 잘 싸워도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틀어질 수 있잖아요. 나는 나와의 싸움이 가장 좋은 싸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일같이 나와 싸워요.”

 민정= “공연 준비로 바쁠 테지만 요 근래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요.” 

지영= “그거는 봤어요. ‘82년생 김지영’이요. 김지영이라는데 어떻게 김지영이 안 봐요(웃음). 온전히 제목만 보고 사서 술술 읽었고요, 지금은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이랑 시리즈 ‘고전 결박을 풀다’랑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있어요. 비교적 책은 빨리 읽는 편이에요. 그리고 중간까지는 훅 보다가 꼭 결말을 먼저 봐요.”

 민정= “지영씨에게 있어 발레를 대체할 만한 뭔가가 있기는 할까요?” 

지영= “그렇게 물어보면 대답이 없어요. 너무 다여서요. 예전에 어떤 일본 잡지에서 인터뷰를 할 때 그걸 물어서 제가 발레는 엄마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렸을 적에는 엄마가 전부잖아요. 그러다가 사춘기 지나서 엄마랑 싸우기도 하면서 그 누구보다 원수가 되기도 하잖아요. 그러다가 시집가고 엄마가 되기도 하면서 그 누구보다 모든 걸 이해해주는 친한 친구가 되잖아요.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발레는 엄마가 아닌가 하고요.”

김민정 시인∙난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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