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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의 삶” 한국 현대정치사의 풍운아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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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생애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 한다.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도와 5ㆍ16 쿠데타를 주도한 후 ‘정권의 2인자’로서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으나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혀 야인 생활을 보냈다. 또 3김(金) 시대를 이끈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파를 넘나드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문민정부ㆍ국민의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대권과 인연이 없어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산업화ㆍ민주화 과정에서 영욕의 부침을 거듭한 그야말로 정치 풍운아의 삶이었다.
한학자의 5남으로 출생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에서 지역 유지로 부여면장을 지낸 아버지 김상배씨와 어머니 이정훈씨 사이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김 전 총리는 평소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신 분은 아버지”라고 말했다. 근엄한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직접 야단 치는 법이 없었고 칭찬은 주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듣게 했다고 한다. 김 전 총리의 붓글씨 솜씨도 아버지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 붓글씨가 싫증나 도망쳤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선친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인 후 붓글씨를 마치도록 했다. 1944년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주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중퇴하고 귀국,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충남 보령군에 있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임관 후 박정희와의 인연
김 전 총리는 서울대 2학년을 수료한 후 1948년 일반병으로 입대했으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탈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도피처는 군대였다.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자수한 뒤 1949년 육사 8기생으로 입학,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배치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인연은 시작됐다.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 가입 사실이 드러나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으나 육군 정보국 백선엽 대령 등의 선처로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 전 총리는 대위 시절인 1952년 2월 박 전 대통령의 조카인 박영옥씨와 결혼, 조카사위와 처삼촌 관계가 됐다.
군에서 주로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김 전 총리는 4ㆍ19 직후인 1960년 5월 육사 8기 동기들과 정군(整軍)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상부에 제출하려다 발각돼 자진 예편했다.
5ㆍ16 쿠데타로 36세에 정권 2인자로
김 전 총리는 졸지에 예비역(중령)이 됐지만 처삼촌인 박 전 대통령과 꾸준히 교류를 이어온 덕분에 1961년 5ㆍ16 쿠데타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이후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끌면서 현역으로 복귀, 국가재건최고위원을 겸임한 것이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였다. 특히 시국정화단 등을 개편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에 임명되면서 서른 여섯 나이에 군부 제2의 실력자로 등극했다. 그러나 5ㆍ16 쿠데타를 이끈 박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라는 지위는 공화당 집권 18년 동안 그의 부침을 거듭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1월 민정이양 구상의 하나로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했고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도 주도했다. 그러나 권력을 둘러싼 육사 5ㆍ6기생들과 반목이 발생하면서 공화당 창당을 불과 1주일 앞두고 “자의 반 타의 반”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외유를 떠났다. 하지만 그 해 10월 제5대 대선에서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귀국, 11월 총선 때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어 12월 공화당 의장에 선출돼 승승장구할 듯 보였지만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1965년 한일협정의 근간이 됐던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공개되면서 위기에 처했다. 한일협정 막후교섭 중이던 1962년 11월 작성된 ‘김-오히라 메모’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재일동포 지위 등의 현안은 뒤로 한 채 우리 정부의 대일청구권을 ‘무상제공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갈음한 것이 골자다. 이는 지금까지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반복되게 한 화근이었다. 그는 훗날 “내가 이완용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한일협정 반대운동(6ㆍ3 운동)이 커지자 결국 1964년 6월 2차 외유를 떠났다.
박정희에 대한 견제ㆍ순응의 반복
김 전 총리는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 이듬해 부정ㆍ타락 선거 논란이 커지자 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당시 공화당은 ‘대통령 3선 연임 금지’ 헌법 조항을 바꾸기 위한 개헌선 확보를 위해 무리한 선거를 주도했다. ‘막걸리 선거’라는 비아냥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도 처음엔 3선 개헌 움직임에 반대하면서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았다. 서슬 퍼런 절대권력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2인자인 조카사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절정에 달한 것이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이었다. 공화당 내 김 전 총리 지지 인사들이 박 전 대통령이 3선 연임 제한에 걸린 1971년 대선에서 김 전 총리를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해 사조직을 만들어 해당행위를 했다는 사건이었다. 당내에서 끊임 없는 견제가 이어지자 그는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회동 이후 돌연 입장을 바꿔 3선 개헌 홍보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은 국무총리로 재직했던 1972년 12월 유신 때도 반복됐다. 애초 유신 반대 입장을 번복하고 박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유신정권 창출에 참여하면서 총리로서 실권을 유지했다. 이를 두고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권력에 순응하는 ‘굴신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군부에 의해 퇴출
박 전 대통령 그늘에서 2인자 역할에 머물렀던 그에게 1979년 10ㆍ26 이후 권력 공백상태는 기회인 듯 보였다. 그 해 11월 12일 공화당 당무회의에서 총재로 선출된 그는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고,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YS, 재야 지도자였던 DJ과 함께 대권의 꿈을 키워나갔다. 대다수 국민들은 1980년 ‘서울의 봄’을 기대하면서 이들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새로운 정부를 세워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김 전 총리는 당시 정치상황을 ‘춘래불사춘’(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아니다)이란 말로 비유했다.
민주화가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대로 그 역시 5월 18일 새벽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에 체포됐다. 이후 46일간의 구금생활 끝에 유신시대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퇴출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충청 맹주로 정계 복귀
전두환 정권 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권을 떠나야 했던 그는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박정희 정부의 공화당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였으나 유신잔당이란 비판을 듣기도 했다. 결국 ‘1노 3김’의 대결로 치러진 1987년 제13대 대선에서 그는 8.1%의 득표율에 그치며 4위를 차지했다.
좌절은 길지 않았다. 이듬해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그가 이끈 신민주공화당은 대전ㆍ충남을 중심으로 35석을 획득해 ‘녹색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며 무시 못할 정치적 위상을 유지했다.
3당 합당으로 여권 합류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총선에서 제3당으로 전락한 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민주자유당 출범으로 김 전 총리는 야당 총재에서 거대 집권여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민자당 내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미완의 실험으로 종료됐다.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려는 YS와 갈등을 빚은 그는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YS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의 흔적을 씻어내고 민자당을 친정체제로 구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김 전 총리는 민자당을 탈당,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자신이 기획ㆍ창당한 네 번째 당이었다. 그는 충청을 지역 기반으로 삼아 문민정부에서 소외된 대구ㆍ경북 인사들을 영입해 당세를 확장했다. 특히 1995년 민선으로 전환된 지방선거에서 대전ㆍ충남ㆍ충북은 물론 강원지사까지 당선시키면서 중부지역의 맹주로 떠올랐다.
DJP 연합으로 실세형 국무총리로
지방선거 선전에 이어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자민련은 지역구 41석과 전국구 9석 등 총 50석을 확보, 민자당,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이은 제3당이 됐다. 김 전 총리는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이념적으로 거리를 뒀던 DJ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DJP 연합’을 깜짝 발표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대선에 나서고 정권을 잡을 경우 초대 국무총리를 김종필 총재로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당시 수도권ㆍ호남 외에 표의 확장성이 절실했던 DJ로선 자민련의 충청 표가 필요했다. DJP연합은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의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게 된 그는 실세 총리로 2인자 역할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내각제 개헌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대북관계에 대한 이견이 심해지자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했다.
자민련 몰락 후 칩거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에 3석 못 미치는 17석에 그치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둘러싼 지속된 갈등 끝에 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DJP연합은 붕괴됐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자민련은 2004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탄핵 직후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 4석을 얻는 데 그쳤고 JP도 헌정사상 최초의 10선 의원을 노리며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섰으나 정당 득표율 2.9%에 그쳐 낙선하고 말았다. 이는 자민련의 몰락뿐 아니라 김 전 총리의 정계은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자민련 이후 충청을 기반으로 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창당했으나 김 전 총리는 참여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하면서 재활에 주력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소원한 관계였던 처조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고, 2013년 9월 자신의 호를 딴 운정회(雲庭會) 창립총회 참석 차 국회를 방문한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 나들이였다. 김회경기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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