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되려 살인…” 조현병 환자의 ‘의문의 한 마디’

입력
2018.04.10 04:4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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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흔적 전혀 없는 현장

이불 젖히자 피해자 성한 곳 없어

온몸 피투성이에 처참한 모습

범인 혈흔ㆍ범행 도구 남지 않아

큰 원한 있거나 정신이상자 추정

#입증 못할 황당한 진술

정신이상자가 파출소 찾아 자수

“내가 사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얼토당토 않은 말만 이어졌지만

범행 묘사 재현 희한하게 구체적

#모든 정황 증거를 모아라

“판잣집 아저씨보다 먼저 살해…

할머니 집에 가 사건 일어나”

용의자 일기장서 범행 기록 확보

심리검사서 “진술 신빙성” 소견도

“심신장애 상태서 범죄 저질러”

법원, 자백 인정 징역 20년

그날따라 파출소는 민원인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다짜고짜 내뱉는 악다구니부터 눈물과 콧물 섞인 울먹임까지, 한데 뒤섞인 그저 ‘왁자지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호소와 하소연 뒤로 조용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남성이 있었다. 40대 중반 허모씨. “원래 자주 말썽 부리고, 가끔씩 여기로도 찾아와서 헛소리만 늘어놓던 사람이었습니다.” 박동일 당시 파출소 순찰2팀장(현 울산울주경찰서 형사4팀장)은 그를 그렇게 기억했다. 박 팀장만이 아니었다. 그곳 파출소에 일하는 사람은 모두 그를 ‘정신이 약간 이상한 골치덩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그날은 기분 나쁘리만큼 차분했다. 2014년 6월 4일이었다.

“뭐라고요?” 허씨 말에 파출소 직원이 눈을 힘껏 치켜 떴다. “이 양반 뭐라는 거야?” 당황한 듯 직원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제가요. 사람을 죽였는데요. 그걸 해결하러 왔다니까요. 좀 도와주세요.” 허씨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내가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것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가 않아서요. 경찰관님이 해결 좀 해줘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정작 경찰 입에서 ‘살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허씨가 횡설수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잘 안 풀린다는 거에요?” “제가 사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이 됐는데, 그게 제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아까 살인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달과 지구의 관계에 대해 아세요?” 엉뚱한 소리가 이어지자, 허씨를 주목했던 직원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시선을 다시 제 일로 돌렸다. 허씨 앞에 앉아 있던 직원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멍할 지경이 될 때까지 헛소리를 해댈 게 분명하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유독 박 팀장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흘러 지나가듯 허씨가 내뱉던 “2년 전에 강가에 있는 판잣집에서 혼자 살고 있던 노인을 내가 죽였다니까요”라는 중얼거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게 악성 민원인의 거짓말이라 할지언정 한 번 알아는 봐야겠다 싶었다. 마침 허씨 말과 겹쳐 떠오르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2년 전 울주군 온양읍 한 무허가 판자촌에서 피투성이로 숨진 채 발견된 ‘울주 판잣집 70대 노인 살인’ 사건. 마침 그곳도 강가에 있는 판자촌이었다. 박 팀장이 돌아가던 허씨를 불러,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사건 기록을 뒤져보기로 했다.

판잣집 살인 사건이 벌어진 건 2012년 6월 19일, 신고가 들어온 건 오후 4시쯤이다. 온양읍 무도산 기슭에 있는 판자촌에서 당시 71세 주민 이모씨 시신이 발견됐다. 평소라면 집 밖으로 나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어야 했을 그 시간 이씨가 보이지 않자, 이웃 서너 명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이씨 집을 찾아간 것이다. “누가 아직 자고 있다고 하길래 그런 줄 알았죠. 진짜 방에 들어가 보니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있더라고요.”

이불을 젖히자 처참한 살인 현장으로 변했다. 수사 기록지에 첨부된 현장 사진만으로도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잔뜩 말라 있던 이씨 몸은 성한 곳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피투성이로 상해 있었다. 양쪽 무릎은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입고 있던 얇은 티셔츠 위로는 신발 자국도 여럿 남겨 있었다.

집 안에 있을 건 그대로 있었다.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 등 방 안에 있던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절도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기록상 범인 흔적은 별달리 드러난 게 없었다. 집 문턱과 장화에서 혈흔이 나왔지만, 모두 이씨 것이었다. 이씨 양손에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잡혀 있었지만, 이 역시 이씨 것이었다. 가격 당하면서 고통에 머리를 감싸다 자기 머리카락을 뽑은 것이라고 이전 수사팀은 추정했다.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씨가 살고 있던 판잣집 주변엔 폐쇄회로(CC)TV가 없었고, 참고할 만한 목격자 진술도 확보돼 있지 않았다. ‘2년 째 사건이 미궁에 빠져 있을 만하다’ 싶었다.

기록을 넘겨보던 박 팀장이 숨을 잠시 멈췄다. 허씨 이름이 등장했다. 이씨 시신이 발견된 다음날 경찰이 DNA를 채취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원한 관계가 있는지 등 조사도 이미 받았다. 별다른 물증이 없어 유력한 용의자로 분류돼 있지는 않았다. 박 팀장은 허씨를 다시 만나보기로 했다. 다만 사건을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2년 전과 마찬가지로 허씨를 범인으로 볼 만한 정황은 없었다. 허씨가 누군지부터 알아보자는 마음이 컸다.

허씨는 2003년 조현병 증세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밖에 생활은 평범했다. 군을 다녀왔고, 4년제 국립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그때까지 학습지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박 팀장은 “살인 사건 범인으로 의심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같이 일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고, 덩치도 웬만한 형사들보다 좋았다”고 그를 떠올렸다. 특히 허씨는 글 쓰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신문사가 주최한 신춘문예에 자신의 작품을 보낸 적도 있다는 말에는 은근 자랑이 섞여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대번 알 수 있을 수천 만원 가량 대기업 주식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근데요, 박팀장님. 제 일 좀 해결해주세요.” 7월 11일, 다시 만난 허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 달 전 파출소를 찾아와 내뱉던 말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다 얘기해봐요.” 박 팀장이 눈을 크게 뜨고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를 꺼냈다. 허씨는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살인이 벌어졌던 이씨 집을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겠다’고 제 발로 찾아갔다. “찍어도 돼지?”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박 팀장이 묻자, 허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을 하는 허씨의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도 구체적이었다. 종합하면 ‘(이씨를) 집 밖으로 불러내서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때려서 쓰러뜨리고 배를 발로 막 밟은 다음에 죽은 시신을 (방안으로) 옮겨서 이불로 덮었다’는 얘기였다. 2년간 잡지 못했던 범인이 지금 눈 앞에 있다는 생각에 박 팀장 몸이 잠시 떨렸다.

문제는 범행 동기였다. ‘왜 그랬지?’라는 질문에 허씨 대답은 허무맹랑했다. “울주군수나 울산시장 같이 큰 사람이 되려면 살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다음 말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여기 말고 또 한 사람을 더 죽였다”는 자백, 이씨를 살해하기 몇 달 전인 2012년 2월 옆집에 살던 한 할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내리쳐 살인을 했다는 얘기였다. “근데 왜, 도대체 왜 그랬는데” 같은 질문이 또 던져졌고, 크게 다르지 않은 답이 다시 돌아왔다. “옆집 할머니가 젊어지기 전에 죽이지 않으면 그 할머니랑 결혼해야 한다고 누가 귀에 대고 계속 얘기를 해서요.”

허씨가 말하는 옆집 할머니는 노모(당시 75)씨로 확인됐다. 만일 노씨가 정말 허씨 말대로 살해됐다면 판잣집 살해 사건에 관한 진술도 단순한 헛소리가 아닐 공산이 컸다. 하지만 노씨를 그때까지 사망자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박 팀장이 울주경찰서 형사과로 발령이 났다. 그냥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팀원들과 함께 두 달여에 거쳐 탐문수사를 벌였고, 마침내 노씨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노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사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어머니가 넘어진 게 아니라 흉기로 맞은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훔쳐간 물건도 없었고, 어머니 치료 때문에 경찰 신고는 생각도 못했고요.” 노씨는 식물인간 상태로 생존해있었고, 노씨 가족은 폭행 사건으로 처리될 경우 의료보험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에 경찰 신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렸다는 허씨 진술과 얼추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2014년 10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선 8시간 허씨에 대한 대면 심리검사가 이뤄졌다. ‘이씨를 야구방망이로 살해하고 방 안에 옮겨놓았다는 허씨 진술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는 소견이 내려졌다. 같은 해 11월 식물인간으로 있던 노씨가 사망했다. ‘고도의 두부손상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부검 결과가 수사팀에 전해졌다. 노씨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로부터도 ‘외상으로 인한 두개 골절’이라는 소견을 받아냈다.

수사팀은 사건 당시 수사기록과 허씨 발언을 하나씩 비교했다. “사건 다음날 경찰이 내 침을 채취해갔다” “옆집 할머니를 판잣집 아저씨보다 먼저 살해했다” 등 허씨 진술 가운데 몇몇은 사실이었다. 마침 ‘아침에 운동 갔다 와서 갑자기 할머니 집에 갔고 사건이 일어났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는 허씨 일기장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팀원들도 점점 증거가 쌓이니까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고 한 수사팀원이 당시를 떠올렸다. 2016년 1월 6일, 허씨가 마침내 구속됐다.

재판에 넘겨진 허씨는 범행을 계속 부인했다. “내가 살해를 했다는 물증이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 내 몸을 조작해 그런 행동을 하게 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특히 조현병에 의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벌인 범죄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둔기로 피해자들의 머리를 수회 내리치는 방법으로 살해했고, 범행 경위, 수법, 내용의 잔혹함 등에 비추어 죄질이 불량하다”라면서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어 “조현병으로 인해 심신장애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고, 치료감호시설에서 치료하지 않을 경우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치료감호를 명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같은 판결을 내렸고, 허씨는 결국 상고를 포기하고 20년형을 받아들였다.

박 팀장은 요즘도 허씨가 꾸준히 편지를 보내온다고 했다. 올해 3월 25일 온 편지까지 총 46통. “누군가 내 마음을 조작해 몸에 (살해) 행동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편지 내용은 언제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울산=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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