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사람이 사람을 보다

입력
2017.10.10 15:46

남과 북의 관계가 무척이나 위태로운 요즘이다. 불안한 국제정세 흐름도 맘을 놓기 어렵다. 과열된 대치 상황에서 13~15일 통일부 주관으로 서울역과 만리동 광장 일대에서 ‘평화로 2017’ 행사가 열린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한국의 미래라는 주제의 많은 체험행사를 준비 중인데, 미래지향적 남북관계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펼쳐지는 자리이기에 현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이 자리에 나는 ‘사람이 사람을 보다’라는 제목의 통일사진전을 준비해 참여하게 되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때 방북전문기자로 불렸을 만큼 자주 북녘 땅을 오가던 시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베이징을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내린 1998년 11월 28일 정오의 가을햇살도 서울처럼 따사롭고 청명했다. 설렘과 두려움에 요동치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는데 콧구멍에 들어차는 공기 기운 역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남과 북은 무엇이든 서로 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묵은 관념의 일부가 편견이라는 틀 속에 기분 좋게 떨어져나갔다. 한마디로 놀라운, 그래서 의외의 반가움이 있는 첫 대면이었다.

이윽고 비슷한 우리네 삶의 형상이 속속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잘거리는 소녀들의 수다가 거리와 공원을 흔들고 고무줄놀이에 정신이 팔린 또래 여자 친구들 틈을 파고들어 고무줄을 끊는 개구쟁이의 장난이 사방에 웃음꽃을 피워냈다. 숲에서 밀어를 속삭이거나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이 괜스레 흐뭇하고, 어린 아이를 고이 안은 엄마들과 성큼 자란 자녀들과 손을 맞잡고 거리를 오가는 아빠들, 교통딱지를 떼이느라 곤혹스러워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반가이 눈인사를 건네는 여인과 어른들, 손주 바라보듯 잔잔히 웃어주는 할머니들까지. 이곳이 평양임을 자각하는 비현실적 실체감 속에서 눈과 귀를 쫑긋 모으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낯설지만 왠지 익숙한 기시감이랄까. 아니면 남과 북으로 나뉜 반 쪽짜리 ‘우리’의 범주가 완전체로 변이되는 느낌이랄까.

그 해를 넘긴 이듬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 해와 다다음 해까지 북녘을 향한 걸음은 이어졌다. 평양을 넘어 황해도, 백두산과 자강도 여기저기를 돌고 걸었다. 때론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나누면서, 다른 줄로만 알았는데 같은 것이 있음에 목구멍이 후끈 뜨거워졌다. 특히 갓 결혼식을 마치고 새신랑과 대동강 강변공원으로 기념촬영을 나온 새신부가 수줍어 빨개진 양 볼을 보이며 내게 건네던 미소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동질적 정체성에 홀딱 마음을 뺏겼던(?) 순간은 지금 떠올려도 코끝이 찡하다.

“림선생!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 무엇이 좋아서 그리 찍습네까? 하하하.” 북측 안내원의 농 섞인 질문도 여러 번 들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지만 빈곤과 억압 체제의 단면만 주입 받아온 나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그 땅에 발을 디디며 보았던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그토록 진한 감흥에 겨워했던 것일까.

평화로 2017 행사는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에 가려 반세기 넘게 알거나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우리의 형상을 전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과연 어떤 반응으로 이 자리가 들썩거릴까. 몹시 궁금하면서 다시 설렘과 두려움이 일렁인다.

지난 2002년 4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상봉 현장을 끝으로 더 이상 북녘 땅을 밟는 기회는 내게 오지 않고 있다. 멈춘 걸음을 다시 잇지 못하니 지금은 아쉬움만 세월에 섞여 하염없이 흐른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날들은 언제 이어질 수 있을까.

임종진 공감 아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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