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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백서, 조율이시? 근거 없다” 차례상은 소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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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박지혜(34ㆍ가명)씨는 4년 전 결혼 직후 시댁의 ‘열린 차례 문화’를 보고 반색했다.
매번 육적, 어적, 전, 나물, 육포, 과일, 대추, 배 등 정해진 기준에 맞춰 상을 차리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닌 다른 집과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올해는 뭘 해먹으면 좋을까?” 명절이 돌아오면 가족들은 서로 의견을 묻곤 했다. 어떤 경우는 새우튀김이나 오징어튀김, 고기류가 당길 때는 갈비 등이 선택됐다. 가족들은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런 한 가지 주 요리를 함께 만들고 다과를 곁들여 차례상에 올렸다.
박씨는 “사실 차례에 올리는 조기나 닭은 정말 인기가 없지 않냐”며 “조상님께는 어떤 음식 종류를 올리느냐보다 마음을 다하는 게 중요하고, 모인 사람이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음식을 하는 방식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모두 모일 수 있는 가족 숫자는 최대 10명. 융통성이 십분 발휘되는 이 가족의 명절에는 남는 음식이나 재료도, 이로 인해 낭비되는 비용과 노동력도 없다. “시금치 값이 유독 뛰는 해에는 시금치를 피하고 다른 나물을 택해요. 어머니께서 예전부터 이렇게 실용적으로 하셨다고 해요. 다른 친구들은 명절에 전 부치고 음식 하느라 허리도 못 편다는데,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나누니 명절을 더 즐겁게 보내는 것 같아요.”
주자가례에도 없는 어동육서
명절만 돌아오면 ‘차례상 규칙’에 전전긍긍하는 가족이 적지 않다. 어동육서(魚東肉西ㆍ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두동미서(頭東尾西ㆍ생선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좌포우혜 (左脯右醯ㆍ육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조율이시 (棗栗梨枾ㆍ왼쪽부터 대추ㆍ밤ㆍ배ㆍ감), 홍동백서(紅東白西ㆍ붉은 것은 동쪽 흰 것은 서쪽), 고추가루와 마늘 양념을 쓰지 않기 등.
상에 놓는 방법이 문제는 아니다. 어동육서를 지키려면 꼭 계적ㆍ육적ㆍ어적 등을 모두 대령해야 하고, 조율이시를 갖추기 위해선 대추ㆍ밤ㆍ배ㆍ감이 빠짐없이 동원돼야 한다. 나물도 삼색 나물이 기본으로 여겨진 지 오래. 이쯤 되면 주식인 송편이나 떡국ㆍ국ㆍ밥은 기본 중에 기본에 속한다. 적잖은 집에서 이 노동이 온전히 여성들의 몫으로 전가되고, 명절 직후 이혼율이 증가하는 까닭도 이 성대한 차례상 전통과 무관치 않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는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고, 작은 소비 하나에도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에 화석처럼 남은 몇 안 되는 풍경이다. 모두 의구심은 있지만 정해진 규칙을 어기면 정성이 부족한 것 같고, 이를 중시하는 다른 가족의 처지를 생각해 묵묵히 따를 뿐이다. 여기서 분연히 전 뒤집개를 들고 일어나 “도대체 이건 누가 정한 규칙이란 말입니까”를 외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외로 “이런 어동육서 등의 규칙에는 역사적 근거가 없고 집집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적절한 예를 갖추라는 게 유일한 공통 규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음식의 질이나 양보다는 그것을 올리는 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소박한 차례상’의 이점은 무얼까. 우선 요란하게 한 상 차릴 때 드는 육체적 감정적 노동을 줄일 수 있고, 최소 20만~30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아끼게 된다. 또 불필요한 칼로리 섭취를 예방하며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
요란한 상차림 60년대 이후 풍습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과일, 육류 등 추석 차례용품과 재료의 비용은 대형 마트 기준으로 30만3,596원, 전통시장 기준 21만8889원으로 추산됐다. 어동육서 등의 규칙에 따라 상을 차렸을 때 드는 비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언제부터 어동육서를 금과옥조로 삼았을까. 유학 전통을 계승하는 성균관의 박광영 의례부장은 “상다리가 휘어지는 차례상은 1960, 70년대 이후에 서로 집안 뿌리를 양반인 양 과시하려는 문화가 잘못 정착된 것”이라며 “흔히 차례 규칙의 근거로 생각하는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는 실제로는 어동육서 같은 규칙이 없을뿐더러,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기제사상이지 차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포털, 국립민속박물관 등 각 기관이 제작하고 언론이 통용하는 차례상 차림 안내 자료의 근거는 대부분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이다.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반상 구분이 없어지면서 누구나 양반처럼, 벼슬 높은 집안처럼 상을 차리는 게 최고라고 여기는 시기가 잠깐 있었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말살됐고요. 그런데 다시 현대에 와서는 ‘제사에 소홀하면 우리 집안이 과거 상놈 취급받는다’는 인식이 생겨난 거죠.”
하지만 박 의례부장은 “과거부터 기일 제사는 다소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다하는 문화가 있었어도, 명절 차례야말로 아침에 술 한잔 올리고 곁들일 음식을 준비하는 정도가 기본”이라며 “4인 기준 20만~30만원 대의 이런 상차림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는 “명절에 대해 ‘예서’에서는 ‘구할 수 있는 간단한 채소나 과일을 준비해 올린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어동육서의 경우 일부 가문이 중국을 기준으로, 동쪽이 바다라 생선을, 서쪽이 육지라 고기를 놓았다(‘송자대전’)는 설명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선 유교 예법의 기준이 된 고대 중국문헌에도 이런 복잡한 규칙은 없다고 한다. 음식문헌을 연구하는 고영씨는 “국조오례의, 주자가례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은 예법까지 정부와 언론의 과도한 권고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며 “어느 지역, 어떤 집안의 규칙이었을 순 있으나 전 국민이 따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규칙들이 메모랜덤이 된 이 현상은 거의 인류학적 연구 주제”라고 분석했다.
“쉬며 놀며 원하는 음식 즐기자”
고씨는 “절기로 봐도 추석이 미국식 추수감사절과는 완전히 다른 명절”이라며 “벼를 본격 수확하기 전으로 과거 농촌에서 풍성한 음식이 있을 수가 없는데 추석에 앞서 대대적인 매출, 소비 세리머니를 하려다 보니 여기에 맞춰 과수 출하를 앞당겨야 해 농가에 무리를 준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민족 최대명절’ ‘풍성한 한가위’ ‘푸짐한 인심’ 등의 판촉 구호만 난무했지 ‘추수에 앞서 모두에게 쉴 틈을 주자’는 명절의 핵심 가치는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푸짐한 차례상에 대한 압박으로 명절이 걸핏하면 노동탄압, 남녀차별의 주범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 박광영 의례부장은 “억울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궁에서는 오히려 대령숙수, 즉 남성이 음식을 했어요. 지금도 규율을 중시한다는 종가에서는 남자들이 장을 보고 음식을 함께 하고요. 여성만 일을 하게 한다? 그건 유교를 잘못 이해한 거예요.”
한국기후환경네트워크는 2010년부터 ‘저탄소 명절’ 캠페인의 일환으로 ‘간소한 차례상 차리기’를 실천 수칙으로 제안한다. 오종민 간사는 “명절에 특히 푸짐한 상차림으로 과식하거나,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을 늘리는 경우가 많은데 꼭 먹을 만큼만 조리해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의 20%를 줄이면 제주도 전체 인구가 한 해 겨울을 날 수 있는 에너지양을 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의 화목과 건강, 지구환경까지 생각해 차례상을 소박하게 차리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상은 조상께 올릴 술을 중심으로 차리고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이 선호하는 음식으로 구성하되 ▦필요하면 적ㆍ나물ㆍ과일 등은 한 가지씩 ▦모인 이가 함께 먹고 남기지 않을 만큼만 준비하되 ▦차림부터 정리까지 모든 노동은 남녀가 함께 하면 된다.
2년 전부터 서울에 위치한 할아버지 묘역에 소반과 두 세 가지 음식을 챙겨가 절을 올리는 것으로 차례를 대신한 회사원 최준명(36ㆍ가명)씨 가족에게는 뱃살을 늘리는 명절 과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상에는 정성스럽게 부친 생선전, 과일 한가지, 떡국(혹은 송편) 등을 올린다. 최씨는 “과식할 일도 없고 아내나 저나 과로하고 짜증낼 필요 없이 가족이 편하게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며 “궁극적으로는 집집마다 차례상이 꼭 필요한지 생각해봐야겠지만 아직 어른들께서 원하니 소박하게 차린 상이 적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댁의 실용적 차례상에 반한 박지혜씨도 기쁜 마음으로 명절을 기다린다. “사실 어머님께선 예전부터 차례를 생략하고 여행을 가자고 하셨는데 아버님께선 차례를 원하셨죠. 우선 절충안으로 가족들이 원하는 메뉴의 차례상이 나온 거예요. 막상 이것저것 찬을 올리다 보면 그렇게 빈약해 보이지도 않아요. 어떻게 차리든 궁극적으로 가족들이 화목하게 보내는 것, 그게 추석에 더 어울리는 일 아닐까요.“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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