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허위감정, 국가ㆍ국과수 직원이 책임”

입력
2017.07.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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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원칙 무시… 6억원 배상 판결

법원, 수사검사 책임은 인정 안해

1991년 당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강씨가 필적을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1991년 당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강씨가 필적을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고 김기설씨 유서대필 조작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24년 만에 유서대필 혐의(자살방조)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은 강기훈씨에게 국가와 필적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시 수사 검사의 배상 책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부장 김춘호)는 6일 강씨와 가족들이 국가와 당시 수사책임자였던 담당검사 두 명과 거짓으로 필적 감정을 한 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와 김씨가 함께 강씨에게 5억2,000여만원 등 총 6억8,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필적 감정을 하면서 기본 원칙도 지키지 않고 위법을 저질러 수사와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가 됐다”며 “허위 감정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래 전 발생한 사건이지만 허위 감정으로 인해 강씨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무죄 판결)이 최근 밝혀졌기 때문에 불법행위에 대한 소멸시효(국가 5년, 일반인 10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도 밝혔다.

그러나 강씨가 수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폭압 행위를 한 것으로 지목한 수사검사 두 명에 대해선 20년이 넘은 사건이므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며 배상책임을 묻지 않았다. 또 재판부는 검사가 의도적으로 허위 감정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게 증명되지 않아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강씨는 유서대필 조작 혐의를 벗은 데 이어 국가 배상까지 받을 수 있게 됐지만 끝내 수사기관의 사과를 받지도, 책임을 묻지도 못하게 됐다. 강씨 측은 유감을 표명했다. 암 투병 중인 강씨는 이날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대리인 송상교 변호사는 “강씨가 무죄 판결을 받고 가장 원했던 것은 가해자들의 사과였지만 모두 책임을 회피했다”며 “책임을 묻고자 민사소송에서 국가와 가해 공무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소송을 진행했는데 법원은 핵심 당사자들의 책임을 부정했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사건을 지휘한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검사의 수사 틀 안에서 움직인 국과수 감정인의 책임만 인정한 것”이라며 “소멸시효가 검사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감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은 1991년 5월 8일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며 분신자살하자 검찰이 그의 친구였던 대학생 강씨를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해 처벌했던 사건이다. 강씨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의 형을 확정 받고 복역했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강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법원은 재심에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지난해 5월 이를 확정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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