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원 칼럼] 교통사고 사망 제로를 향한 길

입력
2017.04.23 09:31

시스템 바꾸면 사망사고 줄일 수 있어

인간 한계 전제로 도로 속도 시설 설계

효율 위주 교통 패러다임과 결별할 때

서울에서 30년 무사고지만 파리에서 운전할 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도로 폭이 좁은 데다 오토바이가 차선을 수시 침범한다. 직선 도로를 일부러 조금씩 구부려 놓았고 회전 교차로가 흔하며 길 군데군데 교통섬도 만들어 놓았다. 길 모르는 사람이 과속하다가는 사고 내기 십상이다. 2002년 교통사고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프랑스는 속도 관리, 교통시설, 음주운전 단속 등 전반을 수선했다. 그 결과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수가 2002년 12명에서 최근 5명 남짓으로 반 이상 줄었다.

교통사고는 세계적으로 매년 125만 명이 생명을 잃는 10대 사망원인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는 교통 사망률이 인구 10만 명당 9.4명(32개국 중 4위), 자동차 만 대당 2명(3위), 차량이동거리 10억 km당 15.5명(1위)으로 매년 5,000명 가까운 사람이 애꿎게 희생된다. 사망사고 대부분이 고속도로 등 외곽에서 발생하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반 이상이 도심에서 생긴다. 특히 어린이, 노인 등 보행자 사망률이 높다.

이런 불명예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 우리는 OECD 회원국 중 신호등 있는 도심 도로의 속도 상한이 50km/h를 넘는 유일한 나라일 정도로 교통안전 개념이 빈약하다. 사고 나면 운전자, 보행자 잘못이거나 그날 일진이 나빠서다. 행인이 수시로 건너고 심야 아니면 자주 막히는 길인데 공간이 조금만 생기면 누가 끼어들세라 질주본능을 드러낸다. 교통안전 인프라가 나아졌다 해도 도로, 속도, 시설, 인식 등 전반이 아직 미흡하다. 안타깝게도 이는 우리 사회가 생명에 부여하는 가치가 어떤 수준인지 방증한다.

차량이 도로의 주인인 현대사회에서 교통사고는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면 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유엔은 2020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목표를 제시했고 OECD 국제교통포럼은 교통사망 제로를 실현하기 위한 시스템 혁신방안(Vision Zero)을 제시했다. Vision Zero에서 주목할 점은 교통안전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거나 계도와 처벌 위주로 대응하던 기존 방식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운전자, 보행자뿐 아니라 도로나 차량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회 전체가 안전에 대한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잠깐 실수해도 주행속도, 도로구조, 안전시설에서 사고 가능성을 “중첩적으로” 차단하도록 시스템을 재설계하라고 권고한다. 교통 사망 제로가 실현가능한지 의구심이 있겠지만 인구 5만 명 이상 유럽 도시 중 교통사고 사망자가 5년 연속 0인 도시가 16개나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교통사고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교통사망 제로는 요원해 보인다. 우리 교통 체제는 여전히 효율과 편리성에 방점이 놓였고 말로는 안전을 외치지만 시스템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 제도를 조그만 바꾸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Vision Zero에서 제시한 것처럼 교통안전이 개인 차원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는 인식이 핵심이다. 국가가 안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통 시스템을 먼저 뜯어고치고 교통 문화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특히 속도의 치명성을 감안할 때 도심 속도 상한을 60-80km/h에서 50km/h로 낮추어야 한다. 상한을 낮출 경우 교통체증 우려가 있겠지만 도심에서 50km/h 이상 속도는 교통흐름을 오히려 저해하는 것으로 이미 실증 분석되었다. 과속이 구조적으로 어렵도록 회전교차로, 둔덕 설치 등 도로와 시설을 재설계해야 하며, 차량장치, 운전자 교육, 중상자 관리체계도 안전 위주로 바꿔야 한다.

시스템을 바꾸고 익숙한 것에서 결별하려면 약간은 불편해질 수 있다. 그러나 가족과 이웃이 사고로 희생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면 그 정도 불편은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다. 생각과 행동, 제도와 관행을 바꾸지 않고 사고 때마다 남 탓해서는 백년하청이다.

윤종원 주OECD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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