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화양연화] 넘어져도 괜찮아

입력
2017.01.13 10:25

열세 번 넘어졌다. 새해 첫날 오대산에서였다. 매해 1월 1일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지 2년째. 30년 장기계획을 세우고 호기롭게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첫 해에는 준비운동이라 생각하고 관악산에 올랐다. 익숙한 산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길을 잃어 산 속을 한참 헤매야 했다. 마음을 놓으면 허를 찔린다는 것,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겨울 산에서는 앞사람의 발자국이 이정표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 가는 길.
겨울 산에서는 앞사람의 발자국이 이정표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 가는 길.

오대산에서는 길을 잃지는 않았다. 순백의 눈은 산을 하얗게 덮었고, 뽀도독 소리를 내며 걸었을 등산객들의 발자국들이 남아있었다. 표지판도 친절했지만, 앞서 간 이들이 발자국이 더 좋은 이정표였다. 문제는 아이젠이었다. 겨울 산을 한두 번 다닌 것도 아닌데, 아이젠을 깜박 잊다니.

적멸보궁까지는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낮게 흐르는 게송은 마음을 더 없이 잔잔하게 만들어줬다. 가쁜 호흡을 고른 후 다시 출발. 본격적 산행의 시작을 알리듯, 길은 가파르게 일어섰다. 곳곳은 얼어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제야 가방을 뒤졌다. 생수 한 통에 노트 하나, 펜 한 자루. 아이젠이 없다고 내려갈 수는 없었다. 살금살금 올랐다. 온 신경이 발에 집중되어 있어, 이곳이 오대산인지 집 앞 궁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100m도 가지 못해 넘어졌다. 눈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출발 전 엄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이제 너도 허리 조심해야 할 나이야. 절대 넘어지지 마라”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는 법. 다행히 한번 넘어지고 나니, 두려움은 줄었다. 발걸음은 대담해졌고 마음은 가벼워졌다. 오대산의 탄탄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고 청량하게 지저귀는 새소리도 날아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누군가 오대산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누군가 오대산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

바닥만 보고 가다, 하늘도 올려다봤다. 하얀 오대산과 푸르른 하늘이 찬란한 색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대산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에는 바람이 살고 있었다. 거센 바람 소리가 동해의 겨울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눈을 감으니 파도가 와락 달려들었다. 문득 백두대간이 물결처럼 보였다. 고요해서 더 좋았다. 욕심도 집착도 탈탈 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방감도 잠깐. 당장 내리막길이 문제였다. 미끄러지는 것을 즐기는 수밖에. 엉거주춤 내려가는 모습에 흰 옷 입은 주목들이 살포시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스키에 다시 도전하게 해준 할머니. 체르마트에서 만난 할머니 덕분에 10년만에 스키부츠를 신었다.
스키에 다시 도전하게 해준 할머니. 체르마트에서 만난 할머니 덕분에 10년만에 스키부츠를 신었다.

고백하자면, 미끄러진 것은 오대산에서만이 아니었다. 올해는 스키를 제대로 타보겠다며, 스키장으로 향했다. 10년 만이었다. 스노보드를 타다 꼬리뼈를 무참하게 부러뜨린 후, 발길을 뚝 끊었다. 스키에 대한 마음이 동한 것은 딱 1년 전.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만난 할머니 때문이다. 마테호른 사진을 찍기 위해 곤돌라에 올랐는데, 안에는 환갑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초록색 스키복을 입고 앉아 계셨다. 취리히에 사는 할머니는 건강을 위해, 즐거움을 위해 매주 쉬는 날이 되면 스키를 타러 온다고 했다. 할머니의 넘치는 에너지를 보니, 치즈로 뭉쳐진 통뼈는 아니지만 ‘한 번 더’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오대산에서 돌아온 지, 하루 만에 평창으로 향했다. 스키를 발에 걸었으나,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출발점에 섰을 때 심장박동은 수없이 빨라졌다. 쌩쌩 날아다니는 스노보드 사이로 잘 내려갈 수 있을까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엉금엉금 내려왔지만, 두 번째는 패트롤 신세를 져야 했다. 이번엔 뼈가 아니라 부츠가 툭하니 부러졌다. 스키전문가인 후배 세빈은 “장비도 자주 써 줘야 해요. 안 쓰면 부러져요”라고 말해줬다.

쓰지 않으면 반응하는 것은 부츠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거들떠보지 않던 몸의 온갖 근육들이 아우성쳤다. 스키부츠가 닿은 자리에는 동그랗게 물집도 생겼다. 살이 밀려 상처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잊었던 감도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바람을 가르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 허둥지둥하던 것도 줄었다. 빠르게 가고 싶을 때는 빠르게, 천천히 가고 싶을 때는 천천히 갈 수 있게 되자, 이제야 스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깨지는 새해의 첫 주였지만, 오히려 자신이 생겼다. 넘어져도 일어나면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되었으니.

채지형 여행작가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