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화양연화] 여행이 끝나고 난 후

입력
2016.08.19 13:28
헬싱키 수오멘린나 요새에서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여행자
헬싱키 수오멘린나 요새에서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여행자

‘한땀 한땀 모은 내 월급의 결정체’. 한 직장인이 내린 여행의 정의다. 일 년에 긴 휴가라고는 고작 한두 번, 그것도 일주일밖에 쓰지 못하는 직장인에게 여름휴가는 하루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다. 늦은 야근에도, 상사의 쓴 소리에도 묵묵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휴가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힘든 시기 중 하나는 팔월 말. 여행에서 돌아왔고 휴가는 끝났다. 후유증이 이만저만 아니다. 상한 피부나 가벼워진 지갑이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기대하는 무엇’이 없어진 게 가장 큰 후유증이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이트 조사에서도 직장인들은 휴가 후 가장 걱정되는 것으로 ‘당분간 휴가가 없다는 상실감’을 꼽았다.

휴가 때면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거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거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동남아 섬을 싸돌아 다녔다. 휴가는 일주일이었지만, 족히 한 달은 보내고 온 기분이었다. 누구보다도 꽉 찬 휴가를 보냈기 때문에, ‘결정체’를 써버린 허전함은 누구보다 컸다.

태국 고산족 마을에서 여행메모를 하고 있는 여행자
태국 고산족 마을에서 여행메모를 하고 있는 여행자

휴가에서 돌아온 후 허전함을 채워준 것은 기록이었다.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자연스레 책상 위에 앉았다. 여행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한줄 한줄 적어 내려갔다. 시장에서 메뚜기 튀김을 맛 볼 때 느낌, 에어컨 없는 버스를 타고 사막을 달리며 받았던 건조함, 시골 동네 꼬마들과 물장난 치던 순간. 기억 속에서 꺼내 적다 보니, 소중한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여행기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와 정치, 경제에도 물음표가 떠올랐다. 물음표를 없애기 위해 책을 찾다 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몸이 하는 여행은 끝이 났지만, 머리와 상상력으로 떠나는 여행은 다시 시작됐다. 베트남 여행을 하고 온 후에 읽었던 호치민 평전은 어찌 그리 흥미진진하고, 핀란드를 다녀온 후 본 핀란드 디자인 이야기는 어찌 그리 재미있던지.

휴가를 다녀온 후 취미는 여행기 쓰기였다. 글 쓰는 것이 이렇게나 즐거웠나 싶을 정도였다. 초등학생 일기 수준의 글이었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 뚫린 구멍이 글쓰기로 조금씩 메워졌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내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이제 낙이 없어’라는 친구들에게 여행기를 써보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쉽게 접근하는 것이 포인트라는 팁도 주면서. 인상적이었던 순간 다섯 가지, 맛있었던 음식 세 가지 먼저 적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큰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말고 작고 사소한 내용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올해 휴가 이야기는 올해 안에 기록할 것. 기억은 휘발되기 때문에, 미루면 기약이 없다.

페루 마추픽추 앞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여행자
페루 마추픽추 앞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여행자

글이 부담스럽다면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도 좋다. 스마트폰 덕분에 모두가 예비 사진가인 시대가 됐다. 사진을 많이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주제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꾸준히 찍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 전문가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새벽의 골목, 시장의 활기찬 모습 등 여행에서 포착한 순간들을 주제별로 정리해보자. 세월이 흐르면 그 사진들은 작품이 되고 내 역사가 된다. 카페에서 자그마한 전시회를 열어볼 수도 있고, 온라인 갤러리를 만들 수도 있다. 휴가 때마다 맘에 드는 사진 10장을 인화해서 책상 앞에 걸어놓는다거나, 엽서로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다.

여행을 기록한 후에는 공유하는 즐거움도 누려보자. ‘누가 관심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움이 되는 누군가는 꼭 있다. 회사 안에서 여행을 좋아하는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 소박한 여행발표회를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내 인생 최고의 여행, 알프스 트레킹 발표회’ ‘숨어있고 싶은 섬, 코사무이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제목을 걸고, 자신이 주인공인 ‘꽃보다 청춘’ 드라마를 펼쳐놓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독립출판을 통해 여행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지금은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디자인이 조금 어설퍼도, 분량이 얇아도 상관없다. 내 이야기를 담은 내 책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는 것이 핵심이니까.

여행을 머릿속에서 꺼내놓는 것, 새로운 창조활동으로 승화시켜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휴가 후유증 극복법이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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