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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다산(茶山)과 다전(茶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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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건너 한 집은 커피전문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피 열풍이 거세다. 과거 일본에서 커피 대용품을 만들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동아일보 1938년 2월 22일자는 북해도(北海道) 농사시험장에서 커피 대용품으로 ‘지고리’라는 것을 성공적으로 재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후 후속 보도가 없는 것으로 봐서 커피의 대용품으로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대표적 기호식품은 커피가 아니라 차(茶)였다. 다(茶)의 옛 글자는 ‘이아(爾雅)’ ‘석목(釋木)’ 등에 도(?ㆍ씀바귀)로 나온다. 도(?)자는 풀 초(草)자의 머리와 고미(苦味), 즉 쓴 맛을 나타내는 여(余)자의 합성어이다. 쓴 듯한 맛 속에 차의 묘미가 담겨 있다. 차는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씨가 도엽(?葉)을 발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오래되었다. 서기전 2세기의 문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신농씨가 온갖 백초(百草)를 맛보다가 하루는 72개의 독을 만났는데, 다(茶)로써 해독했다”고 전하고 있다. 차는 일종의 해독제였다. 그래서 그런지 술 마신 다음날 아침 좋은 차 몇 잔을 마시면 주기(酒氣)가 빠져나가며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된다.
공자가 역대 시를 간추려 편집한 ‘시경(詩經)’ ‘패풍(?風)’ 편에 “누가 차를 쓰다고 했나? 그 달기가 냉이 같은데(誰謂茶苦, 其甘如薺)”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에는 쓴듯하지만 음미하면 달다는 뜻이다. 이런 미묘함 때문인지 차를 노래한 문인들이 많았다. 그 중 당나라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다가(茶歌)’는 차의 깊은 경지를 알게 해주는 시이다. “첫 잔은 목과 입술을 적셔 주고, 둘째 잔은 외로운 시름을 부수게 하고, 셋째 잔은 마른 창자 헤쳐주어 뱃속에는 문자 오천 권만 남게 해주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을 일으켜, 평생의 불평을 땀구멍으로 나가게 해주고, 다섯째 잔은 살과 뼈를 맑게 해 주고, 여섯째 잔은 신선의 영혼과 통하게 해 주고, 일곱째 잔은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맑은 바람이 이는 걸 깨닫게 한다.” 노동의 이 시에서 선비는 뱃속에 문자 오천 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역시 차로 유명했던 당나라 시인 소식(蘇軾)이 ‘시원전다시(試院煎茶詩)’에서 “창자와 배 채울 문자 오천 권은 필요 없고 늘 원하는 것은 잘 자서 해 높이 올랐을 때 차 한 잔뿐이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차와 문자를 연결시키는데 반대하기도 했다.
점필재 김종직는 차가 아니라 술을 가지고 창자 채울 문자라는 표현을 썼다. 임 참판이 쌀을 보내주면서 술 빚을만하다고 말하자 “어찌 술 바꿔 마실 귀어(龜魚)가 있으랴, 스스로 창자 채울 문자도 없는데(豈有龜魚堪換酒 亦無文字自撑腸)”라고 노래했다. 귀어란 금으로 만든 거북이와 물고기인데,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대주억 하감시(對酒憶賀監詩)’ 서문에 태자빈객(太子賓客) 하감(賀監ㆍ하지장(賀知章))이 자신을 장안(長安ㆍ서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적선인(謫仙人)이라고 부르면서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풀어서 술과 바꾸어 마시면서 서로 즐겼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순천도호부’조에는 순천의 토산(土産) 중에 조기, 농어, 문어, 낙지, 은어, 굴, 해삼, 미역 등의 여러 해산물과 함께 조계산의 차를 언급하면서 “설당(雪堂)의 월토(月兎)가 부끄러움을 깨닫겠네”라는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의 시구를 실었다. 설당은 소식을 뜻하고, 월토는 그가 즐겼던 유명한 차 이름이다. 순천의 차가 월토차보다 낫다는 뜻이다.
정조 사후 강진으로 유배 간 정약용이 다산(茶山)이라 자호하고 자신의 거처를 다산초당이라 부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였던 면우(?宇) 곽종석(郭鍾錫ㆍ1846~1919)을 다전(茶田)이라고 불렀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전은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산(伽北山)의 마을 이름인데, 곽종석이 1896년 10월 가솔과 은거해 학문하던 곳이다. 그러나 한 해 전 명성황후가 일본의 야쿠자들에게 살해당하는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거세게 의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다전으로 은거했다고 시대의 조류를 피할 수 없었다.
곽종석은 유림(儒林)이 1919년의 3·1 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가담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래서 같은 해 만 일흔 셋의 고령으로 파리강화회의에 137명 유림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파리장서를 보냈다가 체포되었다. 곽종석은 일제의 법 자체를 부정하면서 자신은 한 사람의 포로라고 항거하며 옥중 투쟁하던 중 급격하게 몸이 나빠졌다. 일제는 옥중에서 사망할 경우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해 죽기 직전에 병 보석 시켰는데 석방 직후 순국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초입 아침,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차와 함께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던 참 선비 다산 정약용과 다전 곽종석의 고난에 찬 삶을 떠올린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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