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 칼럼/12월 25일] 부끄러움의 정치학

입력
2013.12.24 12:00

한국은 참으로 변화무쌍한 사회다. 학회 때문에 자리를 비운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많은 일 가운데 장성택의 처형이라는 스펙터클한 사건과 코레일 철도 노동자 파업이라는 큰 사회적 이슈를 제치고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것은 청년ㆍ학생들의 대자보 릴레이 '안녕들 하십니까'였다.

용산 철거민의 억울한 죽음,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고 막막해진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기관의 불법적 대선개입, 고압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며 음독으로 죽어간 밀양의 무고한 주민, 무한 입시 경쟁의 압력에 자살을 택한 어린 학생들. 이 같은 이웃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아랑곳없이 안녕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또 안녕한 기성세대들에게 이 사회의 젊은이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들의 대자보 릴레이에서 거론하고 있는 개별 사건들에 대해 지금 여기서 정치적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체적 진실'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와 상관없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반어법적 질문 릴레이는 안녕하지 못한 타자로 인해 자신의 안녕을 불편하게 느끼는 집단심성을 반영한다.

해방 이후 남한의 지성사 혹은 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 안녕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안녕해서 불편해하는 이 집단심성의 출현은 분명 시대의 한 획을 긋는 현상일 수 있다. 이 대자보 릴레이가 정치적 동기에 의해 촉발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정의'의 실현 차원을 넘어서 '배려'의 윤리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과거의 민주화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진다.

희망 섞인 과장법으로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배려가 과학적 진리나 정치적 올바름을 대신한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에도 안녕하지 못한' 성소수자가 주변의 이성애자들에게 안녕하시냐고 묻는 대자보나 장애우들의 수업권이 침해된 사실조차 모른 채 '안녕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대자보가 그렇다. 안녕해서 미안한 것이다.

언젠가는 고시 최종합격자로 자기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휘날릴 것으로 믿으면서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안녕하고자 했던 자기가 부끄럽다는 한 복학생의 용기 있는 고백은 더 감동적이다. 그 대자보의 말미에서 "저는 오늘부터 다시 안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안녕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그의 다짐은 읽는 이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이 효과를 '부끄러움의 정치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친구들보다 역사의 격동을 오래 살아 남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피력한 브레히트의 시 이나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을 역설한 지그문트 바우만을 문득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 대자보 릴레이가 주는 잔잔한 감동이다. 언젠가 친일과 독재의 과거 청산 논란이 일었을 때, 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신독재 시절 사법고시에 응시하고 합격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적 자기 응시의 가능성은 아쉽게도 곧 민주화 운동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적 정의의 자기 정당화에 묻혀 버렸다. 노 정권 당시 방송을 책임진 한 인사의 입에서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도미했기 때문에 내 자식들의 이중국적은 보수 세력 자식들의 이중국적과 다르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을 때, 그 정권은 도덕적으로 너무 당당해서 비도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노무현 정권의 실패는 작은 정의의 도덕적 정당성이 부끄러움의 해방적 성찰의 가능성을 덮어버렸을 때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중요하게는 '대중독재'나 '일상적 파시즘' 등에 대한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닫아버림으로써 민주화 운동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평범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부끄러움의 정치학을 설파하는 이 질문 릴레이가 소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그나마 보잘것없는 내 학문의 동력도 광주 민주화 항쟁의 동시대인으로서 갖는 부끄러움이었다. 이 대자보 릴레이가 부끄러움의 해방적 역할을 통해 21세기 한국의 68혁명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ㆍ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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