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는 일제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다

입력
2019.01.17 18:29
수정
2019.01.17 19:2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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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인력거와 인력거꾼. 젊은이가 다리를 꼬고 앉아 의기양양 웃고 있는데, 길가에 서 있는 청년이 그 모습이 아니꼬운 듯 한껏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푸른역사 제공•출처 서양인이 본 조선
20세기 초의 인력거와 인력거꾼. 젊은이가 다리를 꼬고 앉아 의기양양 웃고 있는데, 길가에 서 있는 청년이 그 모습이 아니꼬운 듯 한껏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푸른역사 제공•출처 서양인이 본 조선

‘회사’라는 존재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건 구한말인 1898년. 당시 회사원은 일개 직원이 아니라 출자자나 주주 등 회사의 운명을 책임지는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부하 직원은 고원(雇員), 용인(傭人) 등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모든 직원들을 회사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호칭의 신분 상승에 불과한데도 직원들의 애사심, 충성심이 덩달아 치솟았다. 영악한 회사들은 한발 더 나갔다. 이른바 가족 회사론. “우리는 한 가족”이라며 직원들의 자발적 희생을 독려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공간에 스며든 ‘생활 역사’를 캐내는 데 주력해 온 역사학자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가 또 한 번 전공을 살렸다. ‘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에서다.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3부작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인 ‘우리 역사는 깊다’(2015)에 이어, 저자는 이번에도 소소한 것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개인 ‘몸’의 역사에서 경제, 정치, 문화의 역사로 확장한다.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자양강장제 ‘자양환’ 광고. 왼쪽으로 갈수록 건강한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던 시절이어서, ‘진보의 방향’이 지금과는 반대인 오른쪽에서 왼쪽이었다. 푸른역사 제공.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자양강장제 ‘자양환’ 광고. 왼쪽으로 갈수록 건강한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던 시절이어서, ‘진보의 방향’이 지금과는 반대인 오른쪽에서 왼쪽이었다. 푸른역사 제공.


책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역사를 뒤집어 본다. 여성은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여야 한다는 ‘현모양처(賢母良妻) 주의’는 유교 가부장제의 유산일까. 실은 일제가 주입한 이데올로기였다. 전쟁터로 끌려간 가장 대신 집안을 돌보고 미래의 신민인 아이들을 키우는 순종적 도구로서의 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성의 지상 최대 과제는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돌봄 노동’이었다.

시장은 한동안 금남의 공간이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남성, 아내를 따라 시장에 나온 남성들은 놀림감이었다. 그러나 반전. 1900년대 초까지는 남성이 시장을 독점했다. “여성이 장터에 나가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외간 남자와 말을 섞고 고기와 콩나물을 사는 것 자체가 아들 딸 혼인을 가로막는 흠”(1918년 매일신보)으로 취급 받았다. “고정된 ‘성 역할’이야말로 시대가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저자는 꼬집었다.

1883년 10월 21일 한성순보에 실린 논설에는 “정부가 회사와 계약하여 영업 기반을 마련해주거나 이익을 보증하는 외국의 예에 따라, 조선 정부도 회사를 육성,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저자는 이를 정경유착의 시초로 해석하는데, 1890년대 말부터 정부 권력의 보호 속에 각종 주식회사 등이 속속 출현했다는 점에서 무리는 아닌 듯 하다. 적폐의 역사는 그렇게 유구하다.

‘갑질’은 신자유주의가 상징하는 경제 양극화의 산물일까. 그렇지 않다. 갑질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는 부임 직후 일가 친척을 불러 모아 가마를 타고 금강산 유랑에 나섰다. 가마꾼으로는 금강산에 머물던 승려들을 동원했다. 얼마나 가혹했던지, ‘금강산 중 노릇’은 조선시대 최악의 고역으로 꼽혔다. “스스로 할 수 있고, 하는 게 오히려 편한 일에 굳이 남을 부리면서 위세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자율주행자동차가 상용화해도 남의 힘을 빌려 이동하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충단 공원(위)과 신마치 유곽(아래). 일제는 장충단 바로 옆에 신마치 유곽을 설치하며, 대한제국의 국립추모공간이던 장충단을 ‘능욕’했다. 온갖 마을 지명을 바꾸면서도 장충단 이름을 그대로 둔 것 역시, 충신열사의 이미지를 유곽의 창부(娼婦) 이미지와 중첩시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푸른 역사 제공.
장충단 공원(위)과 신마치 유곽(아래). 일제는 장충단 바로 옆에 신마치 유곽을 설치하며, 대한제국의 국립추모공간이던 장충단을 ‘능욕’했다. 온갖 마을 지명을 바꾸면서도 장충단 이름을 그대로 둔 것 역시, 충신열사의 이미지를 유곽의 창부(娼婦) 이미지와 중첩시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푸른 역사 제공.
일제시대에 촬영한 서울 장충단 공원(위)과 신마치 유곽(아래). 일제는 장충단 바로 옆에 유곽을 설치해 대한제국의 국립추모공간인 장충단을 ‘능욕’했다. 온갖 마을 지명을 바꾸면서도 장충단 이름을 그대로 둔 것도 충신열사의 이미지를 유곽의 창부 이미지와 중첩시키기 위해서였을까. 푸른 역사 제공.
일제시대에 촬영한 서울 장충단 공원(위)과 신마치 유곽(아래). 일제는 장충단 바로 옆에 유곽을 설치해 대한제국의 국립추모공간인 장충단을 ‘능욕’했다. 온갖 마을 지명을 바꾸면서도 장충단 이름을 그대로 둔 것도 충신열사의 이미지를 유곽의 창부 이미지와 중첩시키기 위해서였을까. 푸른 역사 제공.

책은 깨알 같은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독립’이란 말만 들어가도 경기를 일으키던 일제가 서울 독립문엔 손대지 않은 채 바로 옆에 서대문 감옥을 지어 올렸던 이유는 뭘까. 저자는 ‘독립=감옥’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서울 장충단 바로 옆(현재 제일병원 자리)에 일제가 유곽을 조성한 것은 대한제국의 신성한 추모공간에 윤락업소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였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고 나서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에선 대규모 박람회와 축제가 보름 넘게 열렸다. 서울시내 최고의 요리사, 기생들이 총동원된 대규모 유흥장 같았다. “조선 사람들이 망국의 분노를 깨우치지 못하도록 혼을 쏙 빼놓은”, 일종의 3S 전략이었다.

16일 전화로 만난 저자에게 ‘어떤 주제가 가장 애착이 가는지’를 물었다. 저자는 “몸과 사랑 등 개인의 가치 변천을 다룬 부분을 특별히 추천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이다. 가진 자의 표상이었던 “뚱뚱하고 희멀건 몸”은 자기 관리 제대로 못하는 게으름의 낙인이 됐다. 요새는 ‘썸 타는 단계’가 있을 정도로 사랑의 감정이 정교해졌지만, 조선시대 사랑 담론은 척박했다. 결혼은 당사자가 아닌 가부장 간의 계약이었고, 남편과 아내는 사랑보다는 구별과 불평등이 강조되는 부부유별을 떠받치고 살았다.

저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돌직구 발언을 날려 왔다. 책에서도 그 본능을 놓지 않는다. 그는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뤄졌는지 살펴봐야, 더 나은 미래를 내다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오늘 하루가 쌓여 먼 훗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수 있다니. 새해를 맞아 각성하고 성찰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전우용 지음 

 푸른 역사 발행•434쪽•1만9,500원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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