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에 확 높아진 도덕기준, 공직사회 폭로 불렀다

입력
2019.01.04 04:40
수정
2019.01.04 13: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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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우ㆍ신재민, 비리 고발 넘어 정책결정 과정까지 문제 삼아 

 국정농단 사태 후 공무원 보신주의 확산… 제2ㆍ제3 폭로 나올 수도 

김태우(왼쪽) 수사관과 신재민 전 사무관. 연합뉴스
김태우(왼쪽) 수사관과 신재민 전 사무관. 연합뉴스

고요했던 공직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국가 최고기관인 청와대가 하위직 공무원인 6급 주사와 연일 폭로전을 주고 받고, 최고 엘리트 부처 기획재정부는 5급 사무관과 진실 공방에 휩싸였다.

이런 풍경은 과거 흔히 볼 수 없던 것이다. 비위와 부정을 폭로하던 양심선언이 아닌, 정책결정 과정까지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회성 해프닝으로 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이자 앞으로도 지속될 정부 권위에 대한 도전의 단초가 될 거라 경고한다. 여기엔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강화된 공무원들의 보신주의, 촛불혁명으로 집권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정부에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의 시스템을 방치할 경우 제2, 제3의 김태우, 신재민이 계속될 거란 우려도 높다.

 ◇적폐청산으로 높아진 눈높이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강조하듯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다. 출범 후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한 ‘적폐 청산’ 작업을 거치며 과거와의 결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일반 국민은 물론, 공직사회 구성원의 도덕 기준을 크게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부 내 사람과 조직이 대부분 그대로인 이상, 선언적인 말 몇 마디로 모든 행정 절차가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탈바꿈하기는 어렵다.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 수사관은 3일 검찰 조사에 출석하면서 “(청와대가) 자기 측근에 대한 비리 첩보를 보고하면, 모두 직무를 유기하는 행태를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가 KT&G 사장 교체와 세수 호황에 어긋나는 적자국채 발행을 강요했다는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폭로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사장 교체도, 국채 발행도 결국엔 없었지만 ‘정책결정 과정의 불합리’라는 이유만으로 여론을 들썩이게 하는 파괴력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은 적폐청산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론 ‘적폐 같은’ 행태를 보인 문재인 정부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이른바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라는 이름이 붙은 낙하산 인사는 이번 정부에서도 기승이다. 공기업 임원 4명 중 1명이 현 정부 출범에 기여한 공로로 임명된 비 전문가 출신 ‘캠코더’ 인사라는 분석(CEO스코어)도 나왔다. 신 전 사무관이 “청와대가 민영기업인 KT&Gㆍ서울신문 사장 교체를 지시했다”고 주장하며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정부가 이러면 안 된다”는 실망감을 표한 점도 같은 배경에서다.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등 관련 동향'이라는 제목의 문건,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도 유사한 관점에서 보는 이들이 많다. 환경산업기술원,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등 환경부 산하기관 8곳의 임원 21명에 대한 사퇴 동향을 담고 있는 이 문건이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도 잦아 들지 않고 있다.

 ◇국정농단의 학습효과 

최근 공직사회의 파열음은 국정농단 사태 등을 거치며 공무원 사회의 보신주의가 한층 강해진 결과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우선 김태우 수사관 사건의 경우, ‘정권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뒤통수 맞지 않겠다’는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건의 영향이 커 보인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김 수사관이 1년 9개월 전 첩보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가 연일 여론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특별감찰반원이 작성하는 첩보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바로 폐기한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수사관은 검찰로 복귀할 때 자신이 작성했던 각종 첩보보고서와 근거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작성, 국정교과서 강행 지시를 따랐던 공무원들이 정권교체 후 문책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보호 심리가 작동했을 공산이 크다.

이명박 정부 시절 진행된 4대강 사업은 박근혜ㆍ문재인 정부까지 3번에 걸친 감사가 이뤄졌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의 문화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포함한 국정농단 사태 조사 과정에서 사무관까지 책임을 지는 모습에 젊은 공무원들에게도 ‘정권이 바뀌면 책임을 질 수도 있구나’하는 공포가 체화했다는 얘기다.

신 전 사무관이 지난 2일 새벽 유튜브 동영상에서, “모 서기관의 권유로 국채 발행과 관련한 비망록을 기재부 내 다른 사무관들은 작성했다”고 밝힌 점도 비슷한 사례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모 대학 행정학과 교수는 “2년 넘게 적폐 프레임이 공직사회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일을 열심히 했다가 정권 바뀌면 적폐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공무원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해석했다.

실제 공무원의 직무상 책임을 묻는 ‘직권남용죄’는 매년 900~1,000건 수준에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해 8개월 정도를 집권한 2017년 1,325건으로 크게 늘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권남용 해석 범위가 적폐청산 과정에 확대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공무원도 세대 바뀌는데… 막힌 소통 

비록 이례적이긴 하지만 신 전 사무관 같은 내부고발자가 나온 것 자체가 공직사회의 큰 변화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국가를 위한 사명감, 그를 위한 ‘나’의 희생 등 보다는 개인의 행복과 소신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경향이 공직에도 스며 들어 정책결정 과정에까지 공개적으로 의구심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직사회 내 소통 단절 속에 더욱 증폭되는 측면이 있다. “신 전 사무관이 정책결정 과정 일부를 전부로 봤다”는 기재부의 반박은 동시에 그만큼 평소 소통이 부족했다는 반증이다. 고위 간부와 실무자가 서울과 세종에서 떨어져 근무하면서 정책 결정까지 거치는 숱한 과정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 기재부 과장은 “예전엔 상부 지시에 따라 꼭 해야 하는 일이면 국ㆍ과장이 사무관을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정무적인 배경도 설명해줬는데 서울-세종으로 간부와 사무관들이 분리된 생활을 하면서 그럴 기회가 많이 없다”고 전했다.

이창길 세종대 교수는 “(신 전 사무관의 폭로는) 젊은 세대의 문화와 보수적인 공직문화 간 격차가 빚은 현상으로 보인다”며 “공직사회가 충분한 소통을 통해 유연하고,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로 바뀌지 않으면 균열은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세종=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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