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讀古典] 21대 국회개원에 부쳐:껍데기는 가라

입력
2020.05.25 18:00
수정
2020.05.25 20:17
25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전경. 홍인기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전경. 홍인기 기자

촉 땅의 세 상인이 모두 시장에서 약을 팔았다. 그중 한 상인은 좋은 약만을 취급하였는데, 원가를 따져 가격을 정해 제 값에 팔지만 지나친 이윤을 남기지는 않았다. 두 번째 상인은 좋은 약과 나쁜 약을 모두 취급하였는데, 그 값은 고객이 부르는 대로 받는 대신 품질을 값에 맞추었다. 세 번째 상인은 좋은 약은 취급하지 않고, 많이 파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값을 싸게 했으며 더 달라면 더 주면서 인심을 썼다.

사람들은 다투어 세 번째 상인에게 갔는데 그 집 문턱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었으며, 그는 일 년 남짓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좋은 약과 나쁜 약을 두루 취급한 상인에게는 사람들이 조금 뜸하게 갔으나 두 해가 지나자 그 역시 부자가 되었다. 좋은 약만 취급한 상인의 점포는 한낮에도 밤중처럼 조용했으며, 아침은 겨우 먹지만 저녁밥은 부족했다.

‘욱리자(郁離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상과 대중은 속일 수가 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꼭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작자 유기(劉基. 1311~1375)는 작품에서 ‘욱리자’로 분신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날 욱리자가 나라꼴이 하도 기막혀서 재상에게 머릿수를 채우려고 사람을 뽑는 건지, 아니면 인재라고 여겨서 뽑는 건지 물었다. 당연히 인재를 골라 쓴다고 하자 욱리자가 반박한다.

“농부가 밭을 갈 때에 양에게 멍에를 씌우지 않고, 상인이 수레를 몰 때 돼지에게 끌게 하지 않습니다. 일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며 또 일을 그르칠 것을 겁내서입니다. 그래서 옛 태평성대에는 선비를 임용할 때는 반드시 배우게 한 후에 관청에 들이고 실무로 시험하여 능력이 확인된 연후에 임용하였습니다. 가족이나 문벌은 불문하고 오직 현명하다면 주변이 천해도 얕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조정을 맡은 관리는 눈과 귀에만 의지하며 제대로 인재를 선발하지 않으니, 풍채나 태도가 어떻고 말솜씨가 어떻고 하는 것만 보시는 겁니까? 천하의 현인들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고 온통 명망가의 후손과 친근한 사람 중에 게으르고 멋만 내는 어린애들을 뽑으니, 그렇다면 국가를 아낌이 농부가 밭을 아끼고 상인이 수레를 아끼는 것만도 못합니다.”

새 시대는 새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모든 조직은 늘 참신한 인물을 끌어들이려 한다. 정당이 젊은 세대를 우대하고 비례대표로 청년을 내세우는 작금의 풍조와 비슷하다. 그런데 정말 청년이 청년인가. 혹시 겉모양만 청년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단재 신채호는 ‘청년학우회취지서’에서 청년을 격려하며 일갈한 바 있다. “其齡은 靑年이로되 其氣力의 疲弊는 老年과 同하며 其貌는 靑年이로되 其智識의 蒙昧는 幼年과 同하니 靑年靑年이여 是가 어찌 靑年이리오…”(1909년 8월 17일 대한매일신보) 번역하자면 “그 나이는 청년이로되 그 기력의 쇠약함은 늙은이와 같고 그 모습은 청년이로되 그 지식의 어둡고 어리석음은 어린아이와 같으니 청년, 청년이여, 이것이 어찌 청년이리오”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는 이런 글을 쓸 사람은 단언코 단재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년을 위해 써준 글인데 먼저 죽비부터 내리치는 소리가 쩡쩡하다.

그렇다면 역시 연륜이 지긋해야 옳을까. 다시 ‘욱리자’를 보자. 공지교가 좋은 오동나무를 구해 깎아서 거문고를 만들었다. 현을 매고 연주하니 옥구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하의 명품이라 음악을 맡은 관원에게 헌상하였다. 그가 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겼더니 “소리는 좋지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해서, 공지교에게 도로 돌려주었다. 이에 공지교는 칠하는 장인과 상의하여 갈라진 무늬를, 조각공과 상의하여 옛 문양을 새겼다. 그리고 상자에 넣어 땅에 묻어 두었다가 일 년이 지나 꺼내어 품에 안고 시장에 갔다. 높은 분이 시장에 들렀다가 거문고를 보고는 백금을 내고 가져갔다. 그가 조정에 거문고를 헌상하자 악관들이 둘러보며 모두들 말했다. “세상에 드문 명품이로다.”

공지교가 전해 듣고 탄식했다. “슬프다, 이 세상이여! 어찌 거문고의 경우뿐이겠는가? 이렇지 않은 일이 없도다! 일찌감치 궁리하지 않으면 다 함께 망하겠구나!” 그리고는 결국 그곳을 떠나 산에 들어갔다.

좋은 소리 나는 거문고가 명품이건만 골동품이라는 허명에 혹한다. 장식용 인물을 우대하면 진짜 인재는 나라에 등을 진다. 인선(人選)에 신구(新舊)를 따질 필요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자격만 있으면 된다. 곧 21대 국회가 개원한다. 협치를 기대하며 시 한수를 옮겨 본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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