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치 무대 옮기는 여의도 무대, 김무성

입력
2020.05.2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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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연합뉴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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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 거구의 그가 가위를 들고 경제신문 기사를 하나하나 오리고 있었다. “왜 경제 기삽니까.” “앞으로 경제 말고 중요한 게 또 있나. 문재인이 경제를 몰라서 큰일이다.” 그의 사무실엔 소파가 없었다. “왜 없습니까.” “내가 권위를 워낙 싫어한다. 국회의원 배지도 초선 때 말곤 달고 다닌 적이 없다.” “누가 봐도 권력자 아닙니까.” “허허, 내가 무슨 권력을 휘둘렀다고.”

얼마 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김무성 미래통합당 의원 얘기다. 20대 국회가 끝나면 김 의원은 24년 여의도 정치를 접는다. 여의도 정치라고 한정한 건 그가 정치를 계속 할 거라고 다짐하듯 여러 번 말해서다.

죽기살기의 싸움터가 된 여의도에서 김 의원의 퇴장은 손실이다. 담판과 돌파는 김 의원의 특기다. ‘빠루’ 대신 ‘말’로 난제를 해치우는 건 그의 독특한 재주다. 국가 폭력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과거사법의 마지막 매듭을 푼 것도 그였다. 과거사법은 20대 국회에서 폐기되는 수순이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최승우씨가 의원회관 현관 지붕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농성 사흗날 김 의원이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최씨 사연을 한참 들었다.

“내가 풀어 주마.” “진짜 됩니까? 안 되면 죽어뿔랍니다.” “너 죽게 내가 안 놔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 국회 행정안전위 여야 간사를 김 의원은 차례로 만나고 설득했다.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과거사법은 결국 가결됐다. 최씨와 피해자들이 국회 앞 노숙농성을 시작한지 927일만이었다.

‘이것이 정치다.’ 2013년 12월 31일 경향신문 1면 기사 제목이다. “정치가 철도파업을 풀었다”는 문장으로 기사는 시작한다. 기사 사진엔 김명환 철도노조위원장과 악수하는 김 의원이 있다. 그는 국회 국토교통위 소속 여당 평의원이었다. 박근혜 청와대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팔짱을 끼고 있을 때였다. “여권에서 아무도 안 움직이는데 어쩝니까.” 박기춘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의 간청에 김 의원이 나섰다. 부산 지역구에서 곧바로 서울행 KTX에 올랐다. 큰 목소리 때문에 객차 연결 칸에 서서 전화를 돌렸고, 이틀 만에 파업 사태를 풀어냈다.

김 의원은 정치가 정치답게 갈등을 해결한 현장에 자주 나타났다. 모른 체 해도 욕 먹지 않았을 텐데, 엎드려 있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 법인데, 왜 나섰을까. “나는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은 포괄적 뇌물죄 적용 대상이다. 포괄적 책임도 져야 국회의원이다.” 슈퍼 여당의 등장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 21대 국회에선 그의 빈자리가 더 클 것이다.

김 의원은 대통령 권력을 꿈꿨다. 28주간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지키다 맥없이 내려왔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권력을 매력으로 온전히 바꾸지 못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의도에선 권력이 통하지만, 시장과 광장에서 먹히는 건 매력이다. 그의 별명은 무성 대장, 무대다. 바뀐 세상은 대장을 원하지 않는다. 공감하는 권력자, 낮추는 권력자가 매력적이다.

지인 22명에게 ‘김무성 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었다. 14명이 ‘노룩패스 사건’을 꼽았다. 2017년 공항 입국장에서 비서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캐리어를 휙 굴린 사건 말이다. “불순하게 부풀려진 오해”라고 그는 말했다. 몇 초짜리 영상에 담긴 행동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절제하지 않는 권력자’로 기억되고 말았다.

김 의원은 마포에 사무실을 차렸다. “대형 공영주차장 바로 옆이라 거길 골랐다.” 사람을 널리 불러 모으겠다는 큰 그림을 그는 품고 있다. 그 그림 속에서 그는 ‘킹 메이커’가 아닌 ‘킹’이다. 그는 여의도 무대를 떠나 다시 한 번 꿈을 꾼다. 대선까지 22개월, 그는 매력을 발굴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새로이 발견될 수 있을까.

최문선 정치부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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