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마지막 ‘봉숭아 학당’

입력
2020.05.24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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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국회의장이 21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퇴임 기자간담회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희상 국회의장이 21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퇴임 기자간담회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선에 패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국으로 떠난 1993년, 당시 이기택 민주당 대표 아래서 비서실장을 했던 문희상 의원 사무실은 출입기자들의 사랑방이었다. 초선임에도 명쾌한 정국 분석 능력, 줄담배 피우며 정국 현안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는 격의 없는 형식이 매력이었다. 기자들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KBS 개그콘서트 코너명을 가져와 ‘봉숭아 학당’이라고 불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2005년 열린우리당 의장 등 굵직한 자리를 거칠 때마다 봉숭아 학당은 열렸고, 1993년 대표비서실장 시절을 ‘봉숭아 학당 1기’라 구분해 불렀다. 촌철살인의 정국 평가는 시대정신을 읽는 등대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시절에는 비보도를 전제로 말했던 ‘4,000억원 대북지원 의혹의 현 정권 해소’ 발언이 언론 보도로 파문이 일자 봉숭아 학당을 잠정 폐쇄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이제 봉숭아 학당은 끝났고 여러분 기수는 모두 낙제”라는 농담으로 응수했다.

□29일 임기가 종료되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얼마 전 국회에서 퇴임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마지막에도 문 의장은 거침 없고 진솔했다. 수감 중인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그 분(문재인 대통령)의 성격을 미뤄 짐작할 때 아마 못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사실상 훈수를 뒀다. 지난해 패스트트랙 강행에 대해선 “말만 꺼내면 협치, 협치 하던 사람이 결과적으로 강행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쁘면서 서러웠다”고 눈물을 훔쳤다. ‘세습 공천’ 논란에는 “천하의 문희상이 아들 출세시키려고 지위를 이용하겠냐”며 서운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문 의장이 언론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평소 강조했던 ‘더듬이론’이다. “곤충은 방향감각을 상실할까 봐 항상 더듬이를 수선한다. 기자들도 매일매일 더듬이를 점검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언론은 동업자 관계라면서도 “시대정신을 선점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다퉈야 하는 사이”라고도 했다. 문 의장은 점심 약속이 비는 날이면 노장과 지위 여부를 구분하지 않고 기자들과 ‘번개’ 모임을 가질 정도로 언론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다양한 견해와 이견, 반대의 표출이 의회민주주의의 본령이라고 믿기 때문일 터다. 정치권에서 SNS를 통한 국민과의 직접 소통이 대세가 되고 진영 논리로 갈등과 대립이 격화할수록 ‘훈장님’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질 듯하다.

김영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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