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미터법과 세계 측량의 날(5.20)

입력
2020.05.20 04:30
26면
구독
오늘은 국제도량형국이 정한 세계 측량의 날이다. bipm.org
오늘은 국제도량형국이 정한 세계 측량의 날이다. bipm.org

시간을 분할하는 분초처럼 공간의 기준도 인위적 약속이다. 미터법을 쓰자는 17개국 국제협약이 프랑스대혁명기인 1875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됐다. 초기 기준은 길이와 질량에 국한됐다. 길이 단위의 미터는 자오선(남북극을 잇는 지구 원주)의 4,000만분의 1을 1m로 정했고, 그램은 얼음이 녹는 온도에서 1㎤ 정육면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물의 무게였다. 국제사회는 10진법 원칙을 택했다. 그 기준은 여러 차례 물리학과 측지ㆍ측량학의 발전과 함께 변해 왔다. 국제도량형국 총회는 1983년 미터의 기준을 우주 불변의 상수인 빛의 속도로 변환했다. 즉 빛이 진공 상태에서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나아가는 거리를 1m로 통일했다. 이제 인류는 저 장황한 숫자가 근거한 물리학 원리를 알지 못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초 단위의 일상, 통일된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은 부지불식 중에, 길이와 질량과 부피와 시간을 사고와 판단의 주요 변수로 상정한다. 그래서 과장하자면, 측량 행위는 인간 이성의 뿌리이자 바탕이다. 혁명기 프랑스과학아카데미 학자들의 제안을 세계가 공유하게 된 데는 전쟁 등 몇 차례 계기가 있었지만, 유럽 제국주의국가들의 강압적 식민 지배와 전후의 독립이 결정적 변곡점이었다. 세계경제에 서둘러 편입해야 했던 신생 독립국들은 밉든 곱든 옛 종주국과 협력해야 했고, 부득이 유럽의 단위를 수용해야 했다. 한국은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3년 미터법을 법정계량단위로 채택했다.

미국은 미터법을 쓰지 않는 드문 국가 중 하나다. 원년 미터법 협약의 회원국이고, 초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십진법 기준의 화폐를 도입한 이래 여러 차례 의회 및 정부가 미터법 전환을 시도했지만 좌절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3진법 체계의 무게, 길이, 부피, 면적 단위에 익숙한 문화ㆍ관습 때문이고, 워낙 크고 강한 나라여서 혼자 오만해도 별 불편하지 않아서였다. 일부는 프랑스문화 애호의 콤플렉스와 애국주의가 걸림돌이라는 지적도 한다. 하지만 피트와 파운드 단위에 기초한 의식ㆍ무의식적 일상과 창의를, 법과 같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바꿀 경우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으리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