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금융회사는 법의 장막 뒤로 숨지 마라

입력
2020.05.19 04:3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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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OECD 조사보고서는 “규제기관과 감독 당국이 행동주의 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은 통찰력을 이용해 소비자를 도울 수 있다”고 한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경제 활동의 주체인 인간을 완전히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가정하지만 행동주의 경제학은 집단적 광기나 충동적인 주관적 심리 그리고 자기 과신과 확증편향 때문에 인간이 항상 일관되고 합리적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은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빠른 사고를 하지만 단체나 조직은 질서정연한 절차를 부과하면서 천천히 논리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통제한다고 한다. 키코 사태 피해 기업들 중에 환 헤지나 파생상품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지 않은 중형조선사들이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느린 사고가 가능한 금융회사와 달리 빠른 사고를 하는 금융소비자들은 해당 금융상품에 대한 위험 수익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금융상품 설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감독당국도 불완전 판매를 인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금융회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

대법원은 키코 계약에 대해 “은행 등 금융회사와 금융상품 거래를 하는 고객은 그 거래를 통하여 기대할 수 있는 이익과 부담하게 될 위험 등을 스스로 판단하여 궁극적으로 자기의 책임으로 그 거래를 할 것인지의 여부 및 거래의 내용 등을 결정하여야 하고, 이러한 자기 책임의 원칙은 장외파생상품 거래와 같이 복잡하고 위험성이 높은 거래라고 하여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법적 안정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나 자기 책임의 원칙은 금융소비자가 충분하게 제공된 정보를 완벽히 소화할 수 있을 때 적용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대법원의 판결문은 소비자보호에 대한 철학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금융회사들은 이미 소멸 시효가 완성되었는데 피해 보상을 결정하면 업무상 배임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멸 시효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계적으로 권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나 형평의 관념에 비추어 보완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시효 이익의 포기도 가능하다. 또한 이중소송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주주가 특정 이슈에 대한 배임소송을 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한지, 분쟁조정 절차에 따른 배상에 업무상 배임죄의 고의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금융회사를 신뢰한 소비자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임무를 위배하지 않았는데 배임죄가 성립하는지 의문이다. 키코 사태가 피해자들과 그들 가족의 안녕에 장기간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는데도 금융회사들이 배임죄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얻은 평판이나 명성이라는 신뢰의 자산은 도외시한 채 법의 장막 뒤에 숨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서완석 가천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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