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관치금융 비웃는 눈치금융

입력
2020.05.13 04:30
26면
라임자산운용 피해자모임이 지난 7일 서울 금융감독원 앞에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라임자산운용 피해자모임이 지난 7일 서울 금융감독원 앞에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가려있지만, 요즘 한국 금융가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당국의 권고에 ‘하겠다’ ‘못하겠다’ 대신 “기다려봐”만 되뇌는 금융사가 많다. 한편으론 당국이 말도 안 꺼냈는데, 평소엔 시켜도 손사래 쳤을 일을 먼저 하고 나서는 ‘눈치’가 판을 친다.

키코(KIKO) 피해 기업에 대한 은행들의 배상은 5개월째 결정이 미뤄지고 있다. 지난주 하나은행, 신한은행, 대구은행은 금융감독원에 ‘키코 분쟁조정안을 수용할 지’ 답변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또 요청했다. 앞서 금감원은 분쟁조정 심의를 거쳐 6개 은행이 256억원을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벌써 다섯번째 연장 요청이다. 이들은 매번 “이사회 검토가 좀 더 필요하다”는 이유를 든다.

그런데 똑 같이 이사회 검토를 거쳐 이미 결론을 내린 곳이 여럿이다. 일찌감치 지급한 곳(우리은행)도, 거부한 곳(산업은행, 씨티은행)도 있다. 이와 달리 3개 은행은 받아들이는 게 유리할지, 아니어도 괜찮을지 눈치만 보고 있는 셈이다. 초기엔 한 목소리로 “대법원 판결이 끝난 키코 문제를 다시 꺼내 압박한다”며 관치라고 반발하더니, 이젠 창의적인 ‘눈치 금융’으로 맞서고 있다.

작년부터 수익형 금융상품 손실 문제가 시끄럽다. DLF로 불리는 해외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 최대 사모펀드 회사인 라임자산운용의 여러 펀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고객에게 “확실한” 수익을 약속했다가 이를 지키지 못해 혼쭐이 나고 있다. 관련 판매사들은 지금 사법절차와 고객 손실 배상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 마침 코로나 쇼크가 덮치자 몇몇 금융사는 손실 날 것 같은 상품에 이른바 ‘가지급’을 하고 나섰다. 하나은행은 1,100억원 어치를 판 ‘이탈리아 헬스케어 사모펀드’에 손실이 예상되자 지난달 고객에게 원금 50%를 가지급하고 향후 만기가 되면 재정산하겠다고 밝혔다. 신한금융투자도 3,800억원대 독일 헤리티지 부동산 파생결합증권 투자자에게 원금의 50%를 가지급했다.

명백한 책임이 있다면 그냥 전액을 돌려주는 게 맞고, 없다면 끝까지 버티는 게 맞다. 투자는 금융사와 소비자가 맺은 계약이다. 계약 조건에 따라 처분하는 게 원칙이다. 자본시장법은 투자자 손실을 사전에 보장해 주는 것도, 사후에 보전해 주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시장에선 이런 해석이 나온다. DLF 사태로 금융사 수뇌부가 자리 보전까지 위협 받는 걸 보더니 어떻게든 논란거리를 키우지 말자는 계산이라고 말이다. 또 다른 눈치 금융이다.

금융사와 정부는 애증의 관계다. 위기에 정부는 금융사를 편애(공적자금 지원)하지만, 평시 금융사는 정부의 시어머니 역할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관치금융 논란은 계속된다. 알아서 시장이 잘 돌아갈 때는 간섭(관치)이 욕을 먹지만, 시장이 엇나갈 때면 반대로 무능(방관)을 질타 당하는 게 정부의 숙명이다. 요즘 같이 눈치가 난무하면, 한번쯤 꾸짖을 법도 한데 당국도 일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아서인지 별로 나무라지 않는 분위기다. ‘관치와 눈치의 하모니’라고 해야 할까.

금융은 신뢰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신뢰는 맡긴 돈을 불려주는 것만으로 얻을 것은 아니다. 때론 고객에게 불리한 결과가 오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형성된다. 그 자체가 잠재적인 차별과 더 큰 혼란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당국의 권고에 5개월째 답조차 않고, 시키지도 않은 돈을 내주는 행동을 보며 신뢰가 자랄 리 없다.

몇 해 전 한국 금융시장의 성숙도가 우간다보다 못하다고 해 자조적인 논란을 벌인 적이 있다. 한국 금융이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지만, 눈치보기가 횡행하는 수준으로 치자면 우간다 훨씬 밑이라 해도 반박하지는 못할 것 같다.

김용식 경제부장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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