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맛빠기! 인도네시아] 쌀ㆍ라면 등 담은 ‘한국인의 검은 봉지’… 아사 위기 한센인 마을 살리다

입력
2020.05.14 04:3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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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코로나19 상생&협력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에서 한 한센인이 5일 한국인들이 선물한 쌀과 라면 등이 담긴 검은 봉지를 받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에서 한 한센인이 5일 한국인들이 선물한 쌀과 라면 등이 담긴 검은 봉지를 받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선생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4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서쪽 탕에랑(탕거랑)의 시타날라 마을에서 집집마다 검은 봉지 전달식이 열렸다. 볼품은 없지만 제법 두툼한 봉지 안에는 쌀 5㎏, 인도미(현지 라면) 20개, 불닭볶음면 4개, 마스크 4장, 손 소독제 100㎖ 1통이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쪽방촌을 떠오르게 하는 비좁은 골목길 단칸방에서 물건을 받아 든 이들은 대부분 손발이 녹아 내린 한센인의 가족이다. 이날부터 며칠간 한센인 900여가구를 비롯해 총 1,458가구가 한국이 마련해준 선물을 받았다. 기뻐하는 모습을 직접 담고 싶었으나 마을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나왔다는 소식에 가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시타날라 마을은 시타날라병원 뒤편으로 1980년대 조성된 오랑 쿠스타(orang kustaㆍ한센인)들의 집단촌이다. 한센인 900여명을 비롯해 사지는 멀쩡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1,400여가구 5,000여명의 보금자리가 됐다. 시타날라(1889~1958)는 인도네시아의 한센병 퇴치와 독립을 위해 싸운 의사이자 국가 영웅이다.

최영미(오른쪽)씨가 지난해 11월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의 마을회관 마당에서 한센인의 상처 부위를 소독한 뒤 붕대로 싸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최영미(오른쪽)씨가 지난해 11월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의 마을회관 마당에서 한센인의 상처 부위를 소독한 뒤 붕대로 싸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2017년 8월부터 최영미(49)씨 부부가 매달 두 차례씩 환부 소독 등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붕대며 연고며 약품은 대부분 자비로 충당했다. 지난해에는 한센인 자녀들을 위해 공부방도 열었다. 최씨 부부가 챙기는 한센인은 진료기록지상 899명으로 마을 전체 한센인 수와 맞먹는다. 최씨 부부는 인도네시아의 ‘소록도 천사’라 불린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5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봉사는 끊긴 상태다. 최씨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던 치료와 진료를 코로나19 때문에 할 수 없게 됐고 3월부터는 소독약품만 전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은 상처 부위를 주기적으로 소독해주지 않으면 살이 썩어 들어간다.

시타날라 마을의 한센인 데위(왼쪽)씨가 지난해 11월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웃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시타날라 마을의 한센인 데위(왼쪽)씨가 지난해 11월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웃고 있다. 탕에랑=고찬유 특파원

설상가상 한센인들은 매 끼니를 때울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일이 끊겨 공사장 막노동을 못하는 가장, 삯바느질로 먹고 사는데 그마저 일이 없어 아이들을 굶기는 엄마 등 대부분 안타까운 처지에 놓였다. 최씨는 “손발이 불편해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은 지나다니는 차량이 현저히 줄어 더 이상 거리에 나갈 수 없고, 구걸하며 어렵게 키운 자녀들은 인근 상가나 식당이 문을 닫자 자동적으로 실업자가 됐다”고 전했다.

사실 한센인들의 처지를 처음엔 외면하고 싶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저마다 힘든 상황, 5,000㎞나 떨어진 머나먼 이국의 빈민층을 챙길 여력이 우리에게 있을까 반문했다. 반신반의하며 올린 지난달 23일 온라인 기사(인니의 소록도 천사, “아사 위기 한센인 도와달라”)에 한국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응답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의 마을회관에서 현지인들이 4일 한국에서 선물한 쌀을 트럭에서 내린 뒤(왼쪽 사진) 라면과 함께 검은 봉지에 넣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의 마을회관에서 현지인들이 4일 한국에서 선물한 쌀을 트럭에서 내린 뒤(왼쪽 사진) 라면과 함께 검은 봉지에 넣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인도네시아의 한인 전자업체 ㈜삼인도전자는 쌀 5㎏짜리 100포대, 라면 120박스를 선물했다. 김우진(68) 대표는 앞으로 매달 100포대(60만원)씩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김현준(44) 관리이사는 “인도네시아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처음 한센인들의 사연을 알게 돼 감사하고 뜻 깊은 일에 동참하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현지 한인 소매업체 하나마켓은 고객들의 후원으로 한 박스, 한 박스 마련한 인도미 140박스를 시타날라 마을에 배달했다.

우리나라의 해외 첫 수력발전소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한 한국중부발전은 시타날라 마을 1,000가구에 전달할 쌀과 라면을 지원했다. 기금의 절반은 한국 본사가, 절반은 현지 주재원 31명이 모금했다. 이덕섭 현지 법인장은 “‘재난의 크기는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장애인이나 취약 계층에게 재난은 훨씬 가혹하다’는 정부 방침에 발맞춰 현지에서도 가장 열악한 한센인들에게 긴급 식품 지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 주민들이 4일 한국에서 선물한 쌀과 라면을 받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인도네시아 탕에랑의 한센인 집단촌 시타날라 마을 주민들이 4일 한국에서 선물한 쌀과 라면을 받고 있다. 최영미씨 제공

미국 시애틀에 사는 한 교민은 익명으로 1만달러(1,200여만원) 기부를 약속했다. 한국에선 20여명이 1만원에서 40만원까지 후원 계좌를 통해 십시일반 후원했다. 인도네시아 교민들도 다수가 참여했다. 500만루피아(40만원)를 후원한 한 교민은 “마침 월급날이라 참여하게 됐다”고 쑥스러워했다.

덕분에 당초 후원이 부족하면 한센인 중에도 극빈자에게만 나눠주려던 계획은 보다 풍성해졌다. 한센인 가구뿐 아니라 가난한 마을 전체 가구에 모두 쌀과 라면을 전달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한번에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을 대비해 추가 지원할 물량도 확보했다. 최씨는 “누구는 주고 누구는 못 주나, 한편으로 걱정했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후원에 감사한 마음뿐”이라며 “한국도 너무 어려운 시기일 텐데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이 아사 위기에 처한 한센인들을 살렸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빈민촌 아이들이 재인도네시아한인회로부터 마스크를 받고 직접 써보고 있다. 재인도네시아한인회 제공
인도네시아 빈민촌 아이들이 재인도네시아한인회로부터 마스크를 받고 직접 써보고 있다. 재인도네시아한인회 제공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한국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재인도네시아한인회는 쓰레기더미가 산처럼 쌓인 쓰레기산 마을 등에 사는 현지 빈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줬다. 박재한 한인회장은 “지진 홍수 등 인도네시아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나라와의 협력이 빛났다”라며 “양국이 형제국임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5,000㎞나 떨어진 이국의 굶주리고 헐벗은 누군가를 살렸다. 값없이 나눈 선한 영향력은 그래서 값지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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