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나를 안전하게 하는 투표

입력
2020.04.0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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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준비하면서 나를 검열했다. 총선이 9일 남았으니까, 정치를 담당하는 부장이니까, 으리으리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21대 총선에 걸린 이 나라의 운명’ 같은. ‘n번방과 총선’에 대해 쓰기로 결정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나를 빙빙 돌게 한 건 “나중에”라는 음성이었다. “그런 사소한 얘기는 나중에. 정치를 개혁하고, 경제를 살리고, 민족을 중흥시키고 나서, 나중에.”

선거 때면 “나중에”의 위력이 더 커진다. 거창한 무언가를 위해 투표해야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위정자들은 설교한다. 누군가를 표로 심판하라고, 엉뚱한 곳에 표를 던져 더 나쁜 사람들이 이기면 어쩔 거냐고 겁을 준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여성들의 목숨을 구하는 건 나중에. 위대한 대한민국부터 만들고 나서, 나중에.”

‘나중에’는 좀처럼 ‘오늘’이 되지 못한다. 국회에서도 그렇다. 텔레그램 n번방의 성착취를 막아달라는 청원이 올해 1월 국회에 제출됐다. 청원은 10만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가 반드시 다뤄야 하는 정식 안건이 됐다. 국회 전자청원제도가 도입되고 처음이었다. 그러나 청원은 흐지부지됐다. 국회의원들은 n번방 사건이 뭔지 몰랐다. 한달 만에 뚝딱 청원을 종결시켰다. 10만의 애원은 그들에게 나중에 들어도 되는 목소리였다.

국회가 언제나 느리고 무성의한 건 아니다. 세계 섹스돌 시장 선점을 위한 정부 대책을 요구하며 여당 의원이 국정감사장에 섹스돌을 들고 나왔을 때, 그는 재빨랐다. 호기심에 n번방에 들어간 가해자들을 참작해 줘야 한다고 야당 대표가 걱정했을 때, 그는 세심했다. 돈 많은 사람, 표 많은 집단의 이익을 챙기는 법이라면 국회가 얼마나 열심히 고치고 만드는가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욕하고 치워 버리기엔 국회는 너무나 힘이 세다. 법, 정책, 예산, 인사, 여론까지, 죄다 국회가 좌우한다. 온갖 구실을 들어 성범죄자를 용서하는 법을 뜯어 고칠 힘이 국회에 있다. 피해자 보호 예산을 배분할 힘도 국회에 있다. 소라넷, 웹하드, 단톡방, n번방, 그리고 그 다음 무언가의 출현을 제지할 힘도 결국 국회에 있다.

그렇다면, 국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국회의원 300명이 모두 훌륭해질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용감한 1명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어 왔듯, 국회의 변화도 1명이 움트게 할 수 있다.‘범죄가 얼마나 잔혹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지’를 묻는 1명, ‘피해자가 어떻게 당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들을 죽이고 있는지’를 캐는 최초의 1명이 필요하다. 성착취 문화를 끝장내는 법안에 반대표를 던지지 않을 1명, 의결정족수를 채울 최후의 1명 또한 필요하다.

그 1명을 국회로 들여보내는 건 ‘표’다. 다행히 우리는 공평하게 1표씩을 가졌다. 시장경제에선 1원이 1표라지만, 민주선거에선 1명이 1표다. 그 1표를 소중하게, 현명하게, 간절하게 써야 한다. “어차피 될 사람 되겠지, 나 하나쯤이야.”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1’의 외침은 때로 총성보다 멀리 울린다. 청와대 n번방 청원에 500만명이 동의한 결과, n번방에 입장한 모든 가해자를 조사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했다. 경찰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약속했고, 성범죄 가해자 편만 든다는 의심을 산 판사는 n번방 사건에서 손을 뗐다. ‘1’이 하나 둘씩 모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1’을 모아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후보로 나왔는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선거공보물부터 꼼꼼하게 들여다볼 테다.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삶을 산다. 어떤 사람은 위험을 피해 매일을 살아남는다. ‘자기 위험’이 아니면 ‘없는 위험’이라며 “나중에”를 말하는 사람들이 지겹다. 세상을 덜 두려워하며 살고 싶다. 내가 안전하지 않다면 민주주의가, 선거가, 정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투표하러 간다.

최문선 정치부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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