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재난의 틈새에서 발견한 행복

입력
2020.03.31 22:55

코로나19가 세상을 강타하여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대지는 생명을 움 틔우고 있다. 집 근처에 있는 대구수목원 둘레길을 걷고 있노라면 꿈틀거리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돌리면 선 채로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들도 볼 수 있다. 새잎 하나 돋아나지 않는 나무에 새들이 집을 짓고 제 짝을 찾는 신호를 보낸다. 동시에 미세한 크기의 분해자들이 나무 둥치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려고 꼼지락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렇다. 나무는 선 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왔던 데로 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니 이토록 내밀한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오라는 데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늙은 엄마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엄마 집에 가서 밥도 같이 먹고 텔레비전도 같이 보고 같이 누워 뒹굴거리며 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독차지했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줄 게 없는 것 같지만 힘들 때, 외로울 때, 요즘같이 심심할 때 엄마를 찾는다.

올봄은 문득 엄마도 나무처럼 선 채로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나만 보면 옛날 일들을 늘어놓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야기,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추석 장을 보고 오다가 외할아버지가 공산당 놈들에게 끌려가 그 길로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열 살 무렵 육이오 사변으로 걸어서 피난 오던 이야기……. 별로 똑똑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우리 삼남매가 엄마에겐 얼마나 똑똑한 아이들이고, 기쁨이고, 훈장인지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여느 때 같으면 옛날이야기 그만하라고 했겠지만 꾹 참고 듣고 또 들어 준다. 이 또한 2020년 특별한 봄을 생각하면 엄마를 그리워할 시간의 향기가 될 거니까.

일할 때는 일 한다고 시간이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는 자기실현의 꿈을 이루고자 날마다 무언가를 배운다고 시간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는지, 내가 나이를 먹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19라는 재앙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주고 있다. 집에 머무르면서 청소할 시간, 맛있는 밥을 할 시간, 잊었던 엄마를 만나고 그리워할 시간…….

요즘 사람들의 시간 쓰는 법은 이상하다 못해 요상하다. 이를테면, 모두가 시간이 없다고 하다가 아버지가 죽으면 없던 시간이 어찌 그리 생기는지 모든 일을 그만두고 죽은 아버지를 위해 오롯이 시간을 쓴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그 시간을 좀 썼으면 좋으련만. 그러곤 또 살아 있는 엄마를 위해 쓸 시간이 없다. 또다시 엄마가 죽으면 죽은 엄마를 위해 쓸 시간이 생기겠지.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던 것을 하지 않아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꽁꽁 닫혀있던 세상이 열렸다. 오랜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고, 늙은 엄마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생겼다. 해치워야 하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아니라 일상을 즐기고 있는 내가 있다.

이 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내가 너무 좋다.

김숙희 금화복지재단 이사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