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ㆍ담배 싹 끊고 택한 제주행…꿈ㆍ희망 싣고 100만km 달렸죠”

입력
2020.03.30 07: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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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클럽 맨] <3> 제주 유나이티드 차량주임 오경명씨

#K리그는 팬들과 접점인 선수와 지도자는 물론, 구단이 운영되는 데 없어선 안 될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력아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구성원 가운데도 한 자리에 오랜 시간 머물며 K리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원 클럽 맨’들의 삶과 보람을 전합니다.

오경명 제주 유나이티드 차량주임이 제주 서귀포시 클럽하우스에서 구단 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 제공
오경명 제주 유나이티드 차량주임이 제주 서귀포시 클럽하우스에서 구단 버스 운전대를 잡고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 제공

지난 2008년 여름 서울에서 의류 부자재 납품을 하던 33세 청년은 묘하게 끌린 대기업 채용공고에 덜컥 지원했다. 채용 분야는 ‘축구단 버스운전기사 모집’. 30대 초반의 나이에 버스 운전기사라니, 폼도 안 나고 구단 일정에 메여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데 이 청년의 생각은 달랐다. 평소 좋아하던 축구를 가장 가까이서 접하고, 선수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보람 있는 일이란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을 준비했다. 청년은 면접관들 앞에서 ‘안전운전’ 이상의 가치를 얘기했다. “선수들과 꿈과 희망을 나르는 기사가 되고 싶다.” 명랑청년의 당찬 각오에 면접관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과감히 ‘30대 기사님’을 발탁했다.

올해로 13년째 K리그 제주 유나이티드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오경명(45) 차량주임은 젊은 날의 과감한 도전을 인생 최고의 선택으로 꼽는다. 오 주임은 29일 본보와 인터뷰에서 “결혼 2년차에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려야 해 걱정도 많았지만, 입사 확정 후 아내가 흔쾌히 제주 생활에 동의해 줘 고마웠다”고 했다. 제주 생활을 시작하며 구단과 가정을 위해 술과 담배를 싹 끊었는데, 이듬해 딸이 태어나면서 행복날개가 펼쳐졌단다.

오경명 제주 유나이티드 차량주임이 제주 서귀포시 클럽하우스에서 구단 버스에 기대고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 제공
오경명 제주 유나이티드 차량주임이 제주 서귀포시 클럽하우스에서 구단 버스에 기대고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 제공

K리그 22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섬에 연고를 둔 터라 시즌 중 오 주임의 동선은 다른 구단에 비해 유독 까다롭다. 두 대의 구단 버스는 이른바 ‘섬 버스’와 ‘육지버스’로 나뉜다. 원정 때 선수단이 이용하게 되는 육지버스 운행엔 경기 일정에 따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 주임은 “선수들보다 하루 먼저 섬을 떠나, 하루 늦게 귀환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원정 비행기를 타기 전날 홀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한 뒤, 서울역 인근 SK그룹사 건물에 주차돼 있는 육지버스에 각종 장비는 물론 음료와 생수 등을 실어놓는다.

이튿날엔 선수들이 도착할 공항으로 미리 움직여 대기한다. 수도권 일정이라면 비교적 이동이 수월한 김포공항으로 가면 되지만, 수도권 외 지역일 경우 김해, 광주, 대구, 청주공항까지 홀로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다. 원정일정을 소화한 뒤엔 다음 원정일정을 고려해 차량을 이동해놓은 뒤 다시 제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자신이 입사하기 전 버스를 배에 실어 육지를 오가던 때에 비하면 낫다는 게 그의 얘기다.

이렇게 내륙에서 운전한 거리를 합산하면 연간 약 7만km 안팎. 12년간 섬 주행거리까지 합해 약 100만㎞를 내달리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다. 특히 태풍철 선수들이 타게 될 비행기가 결항될 때면 자신이 육지에서 대기해야 할 공항이 수시로 바뀌는 일도 꽤나 익숙하다. 날씨야 어떻든 선수들이 경기를 이긴 뒤 편안한 얼굴로 이동할 때가 본인에게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신영록(앞줄 왼쪽)이 지난달 6일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에서 열린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에 참석해 옛 동료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형준 기자
신영록(앞줄 왼쪽)이 지난달 6일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에서 열린 차범근 축구상 시상식에 참석해 옛 동료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형준 기자

가장 속상한 일은 경기장으로 태워 간 선수가 부상 때문에 함께 돌아오지 못 할 때다. 2011년 5월 경기도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진 신영록(33) 사례가 대표적이다. 오 주임은 “스타 선수임에도 내가 해야 할 생수 운반을 서슴없이 돕던 신영록의 모습이 여전히 선하다”며 “컨디션이 한참 좋아지고 있을 때 사고를 당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고 했다. 오 주임은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아프지만 다시 일어나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줘 감사할 따름”이라며 “비록 신영록이 선수로 돌아오긴 힘든 상황이지만, 미디어를 통해서라도 그의 웃는 모습을 자주 봤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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