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아프면 쉬게 하자

입력
2020.03.25 18:00
수정
2020.03.26 09:5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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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아프면 쉬는 사회’ 요구 점증

질병 입원 따른 경제적 손실 보전책은 전무

상병수당, 병가법제화 등 논의 미뤄선 안돼

12일 서울 중구 명동 거리의 한 상점에 코로나19에 따른 임시휴업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12일 서울 중구 명동 거리의 한 상점에 코로나19에 따른 임시휴업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아프면 쉬어야 한다.’

지극히 합리적인 이 당위론적 명제는 우리나라에선 큰 전염병이 돌아야 주목을 받는다. 5년 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ㆍMERS) 사태 때도 그랬다. 당시 1만6,000명이 넘는 자가 격리자 중 일부가 무단 이탈한 경우가 있었는데 업무ㆍ공무 등의 이유로 집을 벗어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메르스 사태 이후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의 재발을 방지하려면 격리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시민 양식에 호소하는게 아니라 합리적 보상이 자발적 방역의 동참을 이끌어 낸다는 논리였다. 결국 정부는 메르스 종식 이듬해인 2016년 자가 격리자에 생계비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학교에선 개근상이 성실성의 지표로 칭찬받고, 직장에선 아파도 직장에 나오면 책임감 있다고 인정받는 한국 사회에서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말은 먼 나라 얘기다. 메르스 이후 5년 만에 감염병 코로나19가 찾아와서야 다시 이 말이 회자된다. 지난 16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코로나19의 장기전에 대비한 생활수칙을 소개하면서 “각 사업장, 기관, 학교 등은 ‘아파도 나온다’는 문화를 ‘아프면 쉰다’로 바꿀 수 있도록 근무 형태나 근무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아프면 쉬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지만 아파도 쉴 수 없는 건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병으로 쉬는 경우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나마 ‘업무상 사유’에 따른 부상ㆍ질병에 대해서는 산재보험이 일하지 못한 기간 동안 휴업급여(평균임금 70%)를 제공한다. 하지만 업무 이외 질병으로 일을 못할 경우 보통 노동자가 소득 보장을 받을 수 있는 법적 통로는 연간 15~25일간 보장되는 유급휴가가 유일하다.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으로 (유급)병가를 보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형편이 괜찮은 회사의 사내복지 차원이다. 2년 동안 상병에 따른 유급휴직을 받을 수 있는 공무원들이 ‘특수직역’ 이라는 점은 그래서 씁쓸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을 쉬게 되는 순간 생계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팔다리가 쑤시고 신경이 끊겨도 침과 진통제에 의지하며 직장에 나간다. 특히 취약계층 노동자들은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일을 나간다. 건강이 악화돼 약값과 병원비는 늘어나고 그래서 이들은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승윤ㆍ김기태 ‘아픈 노동자는 왜 가난해지는가’ㆍ2017).

병원비는 벌충받을 수 있지만 질병으로 입원했을 경우 소득보전 대책이 전무한 건 우리 건강보험제도의 한계다. 게다가 병에 걸리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몰리거나 치료 후에도 복귀가 여의치 않은 게 한국의 직장 문화다. 이런 사정 때문에 큰 병에 걸리면 중산층이라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시민단체와 노동계는 그래서 이미 20여년 전부터 질병과 업무 연관성을 따지지 않고 치료받는 동안 소득을 현금으로 보전받는 ‘상병수당(sickness benefit)’ 도입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 상관 없이 역대 정부들은 보험료 인상 요인이 된다며 논의 확산을 막는데 급급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상병수당이 없는 나라는 미국, 스위스, 한국 3개국에 불과하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과 금융위기가 겹쳤을 때 유급 상병휴가를 쓸 수 없었던 미국의 많은 노동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픈 노동자들의 발길을 직장으로 이끈 것이다. 결국 직장 동료들을 통해 감염병이 확산되면서 미국에서만 700만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된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감염병 확산을 막는 차원에서라도 상병수당 도입 혹은 근로기준법에 유급병가 명문화 등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제도가 바뀌어야 문화가 바뀐다. 우리 사회가 ‘아플 때 쉴 수 있는 사회’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해 필요한 건 정부와 정치권의 결단이다.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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