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LG는 왜 미국 법정으로 갔을까

입력
2020.03.25 04:30
27면
서울 여의도 LG그룹 본사 트윈타워 전경. LG그룹 제공
서울 여의도 LG그룹 본사 트윈타워 전경. LG그룹 제공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기한 배터리 기술 탈취소송과 관련하여 지난 2월 14일 악의적인 증거인멸(bad faith spoliation of evidence)을 이유로 한 무변론판결(default judgement)이 내려졌다. 최근 공개된 ITC의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SK이노베이션의 문서 훼손 등 증거인멸 행위는 영업비밀 탈취를 숨기기 위한 범행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것이 명백하다”며 “증거인멸과 포렌식(증거분석) 명령 위반 등 법정 모독으로 인해 소송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어 오직 ‘무변론판결’만이 적합한 법적 제재”라는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4월 29일 LG화학이 영업비밀침해 소송을 제기한 바로 다음날 이메일을 통해 이번 소송의 증거가 될 만한 관련 자료의 삭제를 지시하고, 앞서 지난해 4월 8일 LG화학이 내용증명 경고 공문을 보낸 직후 3만4,000여개 파일 및 메일에 대한 증거인멸 정황이 발각된 바 있다고 한다.

LG화학은 같은 한국 기업인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왜 굳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이고 또 소 제기 후 불과 1년도 되기 전에 이런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아마도 미국 소송절차에 우리나라에 없는 증거개시(Discovery)제도가 있고 증거훼손(Spoliation of evidence)에 대한 엄한 제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증거개시제도란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당사자가 상대방이나 제3자로부터 소송에 관계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광범위한 서류의 제출 및 증인에 대한 사전 심문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다. 그리고 증거훼손이란 증거를 보존할 의무를 가진 당사자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은닉하거나 변조하는 등의 행위를 말하는데 미국에서는 특별히 법이나 계약상 의무가 없다 하더라도 소송을 제기당하거나 소송 위협이 있을 경우 증거보존의무가 생기고, 이런 상황에서 증거를 훼손할 경우 아예 본안심리 없이 패소판결을 받는 무변론판결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 기업은 소송을 제기당하거나 법적 조치 경고 서신을 받을 경우 사내 변호사가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이 관련한 자료를 폐기하지 말도록 하는 이메일을 사내에 발송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미국기업이 도덕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경우 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LG화학이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의 자료에 대한 접근권이 없는 데다가 증명방해에 대한 제재도 마땅치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의료소송, 환경소송, 증권소송, 특허소송, 제조물책임소송 등 현대사회의 많은 소송들은 가해자가 증거를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해자로부터 증거를 효과적으로 확보하고, 증명방해에 대처할 제도적 장치가 없을 경우 자칫 ‘진실이 이기는 재판’이 아니라 ‘증거를 가진 쪽이 이기는 재판’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민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을 지지 않는 당사자는 증거자료 제출에 매우 소극적이다.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제도나 문서목록제출명령제도가 있긴 하지만 이를 위반하더라도 특별한 불이익이 없는 것이 현실이며, 증거인멸죄는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서의 증거를 인멸하는 경우에만 성립하므로 민사재판의 증거를 인멸한다고 해서 별다른 제재가 없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기술 탈취로 인해 피해를 보아 공정거래위원회나 법원에 제소를 해도 제대로 된 구제를 받지 못하는 까닭은 기술 탈취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악의적인 증거인멸은 공정하고 효율적인 재판을 방해한다. 더 이상 우리 기업이 미국까지 가서 법적 구제수단을 강구하지 않도록 조속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김주영 변호사ㆍ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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