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말 일이다

입력
2020.03.18 04:30
27면
고슴도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서로 상처를 내지 않을 만한 거리를 안다. 쇼펜하우어는 그걸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했다.
고슴도치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서로 상처를 내지 않을 만한 거리를 안다. 쇼펜하우어는 그걸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했다.

혜민 스님 말이 맞았다. 40대가 된 어느 가을날 깨달으셨다는 세 가지 중에 그 첫 번째 말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세상 사람들은 내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 별일 없냐고 걱정해 주는 놈도 없고, 답답할 텐데 술이나 한잔 하자는 녀석 하나 없고, 모임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놈도 없고, 전화와 카톡은 뚝 끊어져 버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뭐 그리 욕할 건 아니다. 나도 그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스님의 두 번째 깨달음이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을 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

칩거(蟄居) 한 달째다. 지난 5일이 경칩(驚蟄)이었는데 난 아직도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있으니 개구리보다 못한 신세다. 내 동네가 두문동(杜門洞)이 될 줄 몰랐다.

익숙했던 그 모든 것들이 어색해지고 새로워졌다. 외식도, 영화관도, 도서관도, 여행도, 자주 보던 동네 해장국집 아주머니와도 이별을 고했다. 아이들이 귀가해도 스킨십이 없다. “빨리 가서 비누로 손 씻어”다.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도 뵈러 가지 못한다. 한 명 이상 간병이 허락되지 않는다. “얘야, 오며가며 바이러스 옮는다” 당신도 신신당부하신다.

인간관계의 덕목들이 거꾸로 블랙리스트가 됐다. 덕(德)이 독(毒)이 됐다. 건배는 독배가 됐고, 악수는 악수(惡手)다. 대면소통하고, 밥과 술을 함께 먹고, 사랑을 나누는 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가 될 수 있다. 공들이고 가꾸고 길들인 것들이 다 나를 배반했다. 네가 네 시에 온다 해도 난 이제 세 시부터 행복해지지 않는다. 난 두 시부터 너를 걱정할 판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2020년 버전은 옷깃만 스쳐도 악연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딴지 걸려는 거 아니다. 그것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처방전이라는 거 안다. 뭔가 고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쉽게 말하면 ‘칩거’다.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틀어박혀 있자는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리적 거리두기로 이어지는 걸 경계하자는 칼럼을 몇 개 읽었다. 내겐 공자님 말씀이다. 익숙했던 바깥세상과 친구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보니 별로 생각 안 난다. 안 보니 멀어졌다. 간벌이 주는 좋은 점을 알게 됐다. ‘고슴도치 딜레마’ 같은 거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별거 없었다. 저 바다를 어찌 메우겠는가. 가끔 연락선 타고 만나면 될 것을. 다시 혜민 스님이다. 남을 위한다면서 한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를 위함이었다. 세 번째 마지막 깨우침이다.

타율적이긴 했으되 칩거가 그리 볼성사나운 것만도 아니었다.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릴 일이 사라졌으니 마음이 평화롭다. 팔랑귀도 더 이상 쫑긋할 일이 없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버려야 할 것들이 보였다. 부엌 욕실 책장 신발장 베란다까지 다 보인다. 아내의 흰머리도 보인다. 계제에 많은 명함을 과감하게 용도폐기하고, 너절한 공구함도 정리하고, 먼지 쌓인 책들과 낡은 구두 몇 켤레 내다버렸다.

그리 기죽을 일도 아니었다. 좀 멋지게 생각하면 수행이다. 묵언수행이다. 칩거하고 폐구하니 약국 앞에 줄 설 필요 없고, 단어도 어려운 그 비말인가 걱정 안 해서 좋다. 뭐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그 지독한 연애도 끝이 있거늘, 꽃을 꺾는다고 봄이 안 오겠는가.

모처럼 나를 돌아보는 긴 시간을 갖는다. 대체로 비루하고 너절하고 삿되고 고단한 삶이었다. 어디선가 오래전에 읽은 문장이 생각났는데 그 주인은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삶의 크고 작은 압정을 빼내고, 수북이 자란 마음의 잡초를 벌초한다.” 정호승 시인을 훔친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말자.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자.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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