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같은, 사람이더라

입력
2020.03.13 01:00
수정
2020.03.13 08:3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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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바통을 이어받아 육아의 세계에 뛰어 든 적이 있다. 주말에 잠깐씩 아들을 보면서 얻은 자신감으로,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었다. 이쑤시개 통 같은 지하철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됐고,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 수많은 약속, 전화, 이메일과는 이별했다. 어색하면서도 달콤했다.

그런데 그게 몇 달을 못 갔다. 이따금 주말에 애 보는 일과 주양육자로서 매일 아이를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휴직에 후회가 들었다. 육아를 기본으로 청소, 빨래, 요리 같은 갖은 집안일을 병행해야 하는 전업주부의 삶이었다. 두 세 달쯤 지났을까. 몸무게의 1할이 떨어져 나갔고, 틀어놓은 동요 가사에 울컥하는, 우울증 아닌 우울증의 순간도 경험했다. 짧은 말 한마디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애 보느니 차라리 밭을 매지.’

복직 날짜만 손꼽고 있던 나를 구제한 건 어린이집이었다. 아들이 등원한 뒤 나에게 주어지는 몇 시간의 자유는 모든 번뇌를 내려놓게 했다. 어린이집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주변에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어린이집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5년도 더 지난 기억을 소환한 것은 코로나19 사태다. 여러 이슈들 중에서도 해외 각국이 한국(출발)인에 대해 빗장을 건 대목이 그랬다. 복직을 한 뒤에도 아내와 번갈아 가면서 출근길에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겼는데, 아이가 아픈 날은 낭패였다. 아들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우리 아들 때문에 남의 아이들까지 아프면 어쩌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문 앞에서 갈등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나는 약봉지와 함께 아들을 어린이집으로 밀어 넣고 도망치듯 나오곤 했다.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에 미안했고, 어린이집엔 고마웠다. 다른 부모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린이집에서는 열이 나거나 콧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등원을 막지는 않았지만, 당시 어린이집이 아픈 아이들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출근을 포기해야 했던 맞벌이 부모들은 어린이집을 원망했을까. 누굴 들먹일 것도 없이 아이 건강관리에 실패한 부모 자신들을 탓했을 것이다. 더러는 열악한 육아환경이나 허울좋은 일ㆍ가정 양립 정책에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 세상의 야속함에 한숨 한번 내쉬고 말았을 것이다. 그게 인지상정, 세상사이므로.

중국서 건너온 바이러스에 온 나라가 멈춘 것도 못마땅한데, 세계 각국이 한국인 입국 제한에 나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자 우리는 분노했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해줬는데, 그들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냐고. 아프리카로 신혼여행 간 국민들이 외딴곳으로 격리됐다는 소식에, 또 베트남에서 격리된 국민들이 ‘빵 쪼가리’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외교당국의 무능으로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한국인 입국제한 국가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또 한국과 함께 일본까지 입국제한 하는 나라들이 많아지면서 격앙됐던 감정은 가라앉는 분위기다.

그러던 중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전 검역’을 실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들여다 보니 그건 또 세계 최강 미국으로 가는 항공기 승객들만 대상으로 한단다. 인천공항을 찾은 주한 미국 대사는 한국 공항검역이 세계적 표본이라며 치켜세웠다. 그 덕인지 유럽에 대해 통째로 미 입국 금지령을 내린 미국은 한국으로 연결되는 하늘길을 아직 열어 놓고 있다. 불가피하게 움직여야 하는 기업인들을 생각하면 다행스럽지만 이 대목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출국 전 검역’을 진작 작고 힘없는 나라로 향하는 여행객들에게 적용했더라면 하는 것이다.

개도국이 대거 포진한 동남아를 무대로 3년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최근 복귀했다. 그 시간을 통틀어 뚜렷이 남아 있는 기억 하나. 냉엄한 국제관계라지만 각 나라를 움직이는 요소에 포진한 이들은 아픈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 문 앞에서 갈등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미국 대하듯 대했다면 그들은 빗장을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민승 지역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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