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희생양 만들기는 이제 그만

입력
2020.03.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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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6일 일본 정부의 한국발 입국자 2주 격리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서울청사 외교부에 도미타 고지 주한일본대사를 초치한 뒤 면담을 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9일 한국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밝혀 스스로 한국을 스케이프고트 삼았음을 인정했다. 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6일 일본 정부의 한국발 입국자 2주 격리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서울청사 외교부에 도미타 고지 주한일본대사를 초치한 뒤 면담을 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9일 한국에 대한 입국 제한 조치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었다고 밝혀 스스로 한국을 스케이프고트 삼았음을 인정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관련 외신을 읽다 보면 ‘스케이프고트(scapegoatㆍ희생양)’라는 단어와 자주 맞닥뜨린다. 스케이프고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희생양처럼 비난 대상을 설정해 불만에 가득 찬 국민의 주의를 돌리는 정치 현상을 설명할 때 자주 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기 중 하나가 ‘남 탓하기’인 까닭이다.

그의 주요 스케이프고트로는 언론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야당 정치인, 이민자 등이 꼽힌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권위에 타격을 입힐 불리한 증언이 나오면 “가짜 뉴스”라며 언론을 탓하고, 정책 관련 비판에는 “오바마 행정부 때의 결정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무엇보다 2017년 백악관에 성공적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자동화ㆍ무인화 등 구조적 요인에 따른 실업 문제를 이민자 유입 탓으로 돌린 ‘희생양 만들기’ 전략의 덕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빠르게 퍼지고 있는 보건 위기 상황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희생양을 발굴하느라 여념이 없다. 코로나19 진단 검사가 늦어지는 등 대응이 더디다는 비난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식품의약국(FDA)을 통한 검사 규제를 강화해 늦어졌다고 주장했다. 9일(현지시간) 뉴욕증시 폭락도 언론 탓으로 돌렸다.

위기 상황엔 어떤 정치 지도자든 희생양을 찾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최근에는 세계 각국이 너 나 할 것 없이 ‘트럼프식’ 스케이프고트 만들기에 분주한 모양새다.

우선 각국은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을 감염병 확산과 방역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인종 차별이라는 금기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입국 제한 조치가 잇따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불러도 좋다”며 중국발 입국 제한의 선봉에 섰다. 중국에 이어 코로나19 확산세가 가팔라진 한국도 대상이 됐다. 검역 강화 등 한국발 입국에 제한을 둔 국가는 114개국(11일 오전 9시 기준)에 이른다.

사실 자국민의 입국은 허용하면서 특정 국가를 거친 외국인의 입국만 막는 입국 제한 조치의 바이러스 억제 효과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방역을 위한 초기 시간을 벌어주는 지연 효과를 노린다지만 지난달 하순에야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한 미국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입국 제한의 정치적 효과는 확실하다. 코로나19의 무차별적 확산으로 리더십 시험대에 오른 세계 지도자들은 즉각적이고 책임 있는 대응을 한다는 인상을 남김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공고히 할 수 있다. 심지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한국에 대한 때늦은 입국 제한 조치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러스 억제의 초점은 국경을 걸어 잠그는 게 아니라 신속하게 감염병을 진단해 격리 조치하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보건 체제의 구축이다. 오히려 코로나19처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염병과 맞서 싸우려면 국가 수준을 넘어 국제사회가 협력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차원의 대응이 필요해 보인다.

정치인들 입장에선 중국인 또는 아시아인들이 절제 없이 돌아다니고 바이러스를 퍼뜨려 이 모든 위기 상황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공포와 분노를 부추기는 게 참 쉬운 일이다. 국내에서도 중국인 입국 금지에 대한 논란이 두 달 넘게 지속되는 걸 보면 희생양 만들기는 아무래도 버리기 쉽지 않은 카드인 모양이다. 언론 종사자로서 최소한 정치권의 희생양 만들기에 소재를 제공해 비이성적인 공황 상태를 초래하는 역할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말레이시아 국립 말라야대의 보건 시스템 및 정책 선임연구원 스위 컹 코 박사의 말을 빌린다. “바이러스는 여권이 없다. 국경 내에서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여 받은 각국 정부는 이제 서로 협력해야 한다.”

김소연 국제부 차장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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