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Wide]동맹까지 도청한 CIA… 첩보영화의 장면은 사실이었다

입력
2020.03.04 18:00
수정
2020.03.04 18:53
23면

※Deep&Wide는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비밀스런 첩보 요원을 소재로 한 영화 ‘미션 임파서블3’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비밀스런 첩보 요원을 소재로 한 영화 ‘미션 임파서블3’의 한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40년 넘게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 동맹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해독이 용이하도록 조작된 ‘암호장비’를 팔아, 이를 통해 정보를 빼내는 이른바 ‘루비콘 작전(Operation RUBICON)’을 벌여왔다고 워싱턴포스트(WP)와 독일 공영방송 ZDF가 최근 보도해 파문이 일었다. 보도에 따르면 CIA는 1970년부터 서독 연방정보국(BND)과 공동으로 스위스에 본사를 둔 암호장비 전문업체 ‘크립토(Crypto)AG’를 설립했고, 2018년 CIA가 회사지분을 매각할 때까지 이 업체의 장비를 각국 정보기관 및 정부 주요기관에 판매했다. 이 기간 크립토AG는, 한국 일본 등 확인된 62개국을 포함해 세계 120여 개국에 장비를 판매했다. 특히 한국은 1981년 기준으로 8번째로 많은 장비를 매입한 소위 ‘우수 고객’으로 이름을 올리기까지 했다.

CIA와 BND, 그리고 크립토AG는 암호장비와 구입처의 특성상 철저히 비밀이 유지돼야 함에도, 판매된 장비의 사양을 수시로 공유함은 물론, 장비를 반복적으로 조작하거나 때로는 사용설명서를 실제 사용법과 다르게 표기해 자신들이 암호를 해독해 내기 수월하도록 하는 기만도 서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70~80년대 각국의 주요 정보들이 이들 손에 넘어갔으며, 이중에는 △1978년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집트, 이스라엘, 미국이 중동평화협정을 맺을 당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본국과 나눈 기밀 통신내용 △1979년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태 때 비밀 협상채널이었던 알제리가 이란과 벌인 협상내용 등이 포함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한국과 관련해서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재미사업가 박동선을 시켜 미 의회를 상대로 벌인 로비사건인 ‘코리아게이트’에 대해서도 미국은 조작된 장비를 통해 당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외무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번 암호장비 조작 의혹사건으로 동맹이 동맹을 속이고 조작과 기만과 난무하는, 첩보 영화에서나 볼 것 같았던 음모적 커넥션이 현실 세계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과 크립토AG의 비밀스럽고 은밀한 거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특히 미국에서 신호정보(SIGINT, 첨단 전자통신장비를 활용해 신호를 포착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 체계가 구축되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 시작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본부 전경. 위키피디아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본부 전경. 위키피디아

‘베일의 수문장’ 하겔린과 프리드먼

이번에 언론들은 “CIA가 크립토AG를 설립했다”고 보도했으나, 실상 크립토AG는 꼭 100년 전인 1920년 스웨덴의 암호기 발명가인 아비드 게르하르트 담(Arvid Gerhard Damm)에 의해 스톡홀름에서 설립돼됐다. 이 시기 암호기들은 대부분 ‘회전로터 방식’을 택해 보안성을 강화했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사용해 맹위를 떨친 암호기 ‘에니그마’(ENIGMA)도 이때 탄생해 여러 차례 개량화를 거쳤다. 당시 담도 회전로터 방식의 C-36 암호기를 내놓으며 야심 차게 시장을 두드렸고 투자자인 러시아계 스웨덴인 보리스 하겔린(Boris Hagelin)이 합류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초창기 담의 암호기는 에니그마를 능가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927년 담이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대주주가 된 하겔린은 담이 개발해 놓은 A계열 암호기 시리즈를 연이어 시판하며 성공을 이어갔다.

얼마 뒤 나치 독일은 하겔린의 암호기를 외면하고 자국 발명가가 개발한 에니그마를 군용 암호기로 채택해 대량 매입하면서 업계 판도는 순식간에 바뀐다. 하겔린은 백방으로 돌파구를 찾아 나섰는데, 그 사이 히틀러에 의해 포성이 울리자 회사를 미국으로 옮겼다. 하겔린이 회사를 미국으로 옮긴 표면적 이유는 나치가 스웨덴과 인접한 노르웨이를 침공한 것이었으나, 진짜 목적은 미군에 자신의 암호기를 팔려는 데 있었다. 마침 미군은 신형 암호기를 찾고 있었고, 하겔린은 전쟁 기간 미군에 휴대가 용이한 M-209(제조명 C-38) 암호기를 약 14만대 보급하는 개가를 올린다.

하겔린이 미국에서 거둔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영업 대상을 군에서 정보기관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훗날 전 지구적 신호정보체계를 좌우하게 될 운명적 거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 신호정보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윌리엄 프리드먼(William Friedman)과의 협력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암호기 판매업자와 암호해독가로 1930년대부터 익히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전쟁을 거치며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진다.

이 협력관계는 장차 하겔린의 사업에 ‘음모적 요소’가 가미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겔린이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프리드먼은 미군에서도 가장 비밀스런 조직이었던 육군 통신정보국(SIS, 일명 알링턴홀)을 이끌며 대 일본 통신망을 감시하는 ‘매직 작전’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민간인이지만 드물게 일찌감치 신호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1929년 육군에 SIS를 창설한 프리드먼은, 2차 대전 개전을 전후로 독일의 에니그마와 함께 당대 최강의 암호기로 이름난 ‘퍼플’(PUPPLE)을 복제하는 발군의 역량을 과시했고 결국에는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숨은 공로자 중 한 명이 된다. 프리드먼이 이끈 SIS는 전후 확대를 거듭해 1952년 국가안보국(NSA)으로 개편되면서 현재는 전 세계 대부분의 신호정보를 감시, 혹은 관리하는 막강한 정보기관으로 성장했다.

스위스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를 운영한 보리스 하겔린은 미군에 암호기를 대량 판매하고, 미 정보기관과 손잡으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박상민씨 제공
스위스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를 운영한 보리스 하겔린은 미군에 암호기를 대량 판매하고, 미 정보기관과 손잡으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박상민씨 제공
미국 신호정보(SIGINT)체계의 개척자로 평가 받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윌리엄 프리드먼. 박상민씨 제공
미국 신호정보(SIGINT)체계의 개척자로 평가 받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윌리엄 프리드먼. 박상민씨 제공

음모와 밀약, “암호기를 조작하라”

하겔린과 프리드먼은 전후에도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며 암호기와 신호체계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이 때 하겔린이 회사를 스위스로 옮긴 상태였다. 이들은 특정 기종의 암호기를 특정 기관이나 국가에 판매할 지를 놓고 보다 내밀한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1955년 두 사람은 당시 크립토AG가 개발해 판매하던 C/CX-52 암호기의 보안성을 현저히 떨어뜨리거나 매뉴얼을 조작해 다른 국가(아마도 동맹국이 포함된)에 판매하는 방안을 집중 협의했고 묵시적 비밀협약까지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하겔린은 다른 국가에 판매한 암호기의 사양을 꾸준히 NSA에 제공했으며, 같은 정보를 NSA의 전략적 파트너인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에도 건네 암호해독이 수월하도록 도왔다. 이는 최근 불거진 CIA와 크립토AG의 암호장비 조작판매 의혹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는 점에서, 의혹이 모두 사실임을 가정한다면 사실상 ‘음모의 시작’인 셈이다.

1958년 프리드먼이 건강 문제로 첩보계를 떠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종말을 고한다. 하겔린은 이후에도 프리드먼의 업무를 이어받은 NSA의 고위인사 하워드 바로우(Howard Barlow) 등과 꾸준히 접촉하며 밀약을 성실히 이행해 나갔다. 그는 70대 고령에 접어들자 회사 매각을 위해 프랑스 서독 등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는데, 1970년 때마침 CIA가 BND를 끌어들여 약 570만 달러에 인수의향을 밝히면서 비로소 반세기만에 회사의 주인이 바뀌게 된다. BND는 1993년 암호장비 조작의혹이 제기돼 발각 위기에 직면하자 서둘러 손을 뗐으나 CIA는 이에 아랑곳 않고 작전을 지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국방부 소속 정보수집기관인 국가안보국(NSA)과 스위스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가 기능을 조작해 여러 국가에 판매했던 CX-52 암호기. 위키피디아
미국 국방부 소속 정보수집기관인 국가안보국(NSA)과 스위스 암호장비회사 크립토AG가 기능을 조작해 여러 국가에 판매했던 CX-52 암호기. 위키피디아

덩달아 소환된 에셜론 프로그램

크립토AG 암호장비 조작의혹이 불거지자 덩달아 주목된 것이 이른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즉 ‘에셜론 프로그램’(ECHELON Program)이라는 신호정보 체계다. 전후 미국과 영국 주도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이 참여해 전 지구적 통신망을 감시 관리하는 첩보 프로그램이다. 전 대륙 각 비밀거점에서 적대국은 물론, 동맹국이 생산하는 막대한 신호정보를 빠르게 감청하며, 이 정보는 5개 공동체간에 공유된다. 이런 이유로 조작된 암호장비를 통해 누설된 기밀들을 이들 공동체가 사용해온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이와 함께 초창기 에셜론을 설계하고 구축한 인물이 바로 암호기 조작의 주역 중 한명인 윌리엄 프리드먼이라는 점, 또 에셜론의 핵심기관 역시 프리드먼이 창설에 공을 들인 NSA라는 점에서 두 사안의 연관성을 단순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우리 입장에선 동맹에 의한 기밀 누설에 더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이 이 에셜론 첩보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고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미일 동맹으로 묶여있지만, 일본이 스스로를 우위라고 판단했을 때 어떤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만큼 상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상민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일간지 기자출신으로 현재는 첩보사(史)를 연구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중이다. 2016~2018년 ‘국방FM’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첩보ㆍ안보 관련 코너를 진행했으며 저서로는 ‘세기의 스파이’ ‘세기의 첩보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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