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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망하면 다시 심지 뭐” "그것조차 망하면 목련나무 거름 줬다고 생각하자” 한국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룸메이트들과 함께 불광동 2층 주택의 1층으로 터를 옮겼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우리만 쓸 수 있는 작은 마당이다. 마당 안쪽에는 주차장 두 칸만한 텃밭이 있는데 그 작은 텃밭에 엄청나게 큰 목련나무가 있다. 목련나무는 2층 주택보다 훨씬 크고 하늘을 잘게 조각 내며 뻗은 수많은 가지마다 목련꽃 봉오리가 빼곡하다.

옥탑에서 사용했던 캠핑 의자를 펼치고 앉아서 텃밭을 둘러보았다. 커다랗고 못생긴 돌들이 반쯤 썩은 낙엽더미에 듬성듬성 박혀 있었고 깨진 화분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커다란 개집은 지붕이 아래로 간 채 텃밭 한가운데에서 낡아 가고 있었다. 전에 살았던 세입자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아서 이 상태로 2년을 살았다고 했는데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우리 엄마가 이 집에 올 텐데 텃밭을 본 엄마의 반응이 눈에 훤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시상에 귀신 나오게 생겼다” 이 한 마디를 시작으로 당장에 두 팔을 걷고 돌이며 깨진 화분 조각들을 부지런히 치운 뒤 양질의 흙까지 한 포대 사다 깔겠지. 속으로는 이번에도 멀끔한 곳으로 이사 가지 못 했다고 내 걱정을 할 것이다. 나보다 두 뼘은 작은 엄마가 안 해도 될 딸 걱정에 온몸에 흙을 묻히는 모습을 보느니 날을 잡아 내 손으로 텃밭을 정리하는 편이 몸도 마음도 훨씬 더 편하다.

그것도 그렇고, 사실 나는 텃밭 가꾸기에 오랜 로망이 있다. 볕이 안 드는 고시원과 반지하에서 20대의 절반 이상을 보내며 품게 된 로망이다. 작은 화분 하나 마음 놓고 기를 수 없었던 나는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면 작은 텃밭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옥탑으로 이사한 첫 해에 고향집에서 씨앗 몇 봉지를 챙겨왔다. 냉동식품을 주문할 때 딸려 왔던 스티로폼 포장박스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뿌린 뒤 싹이 트기를 기다렸는데, 며칠 바빠서 신경을 못 쓴 사이에 다 말라 죽고 말았다. 씨앗이 움트기엔 옥상이 지나치게 뜨거웠던 것 같다. 그늘 한 점 없는 옥상은 나 같은 초보가 뭔가를 꾸준히 살려 놓기에는 좀 척박한 환경이었다. 이제는 스티로폼 박스에 얄팍하게 깔린 흙이 아닌 진짜 밭이 생겼으니 어쩌면 정말로 뭔가를 기를 수 있지 않을까.

룸메이트 박에게 날이 풀리고 얼었던 흙이 녹으면 텃밭을 갈고 시장에서 비료를 사다 깔자고 말했다. 텃밭 안쪽에는 고추와 오이, 방울토마토를 심고 바깥쪽에는 꽃씨를 뿌리자고. 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 좋은데 오이는 싫으니 심지 말자고 했다. 우리가 정말 오이를 길러 먹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제안이었으므로 기쁘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부숭부숭한 쥐색 꽃봉오리만 빽빽한 목련나무 아래 앉아 폐허에 가까운 텃밭을 보며 곧 흐드러질 목련꽃과 우리가 키워낼 풍성한 작물들을 이야기했다. 박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치, 못 할 것 같아”

“응. 지금보다 더 쓰레기장 되는 거 아니냐. 2층 주인집에서 텃밭이 이게 뭐냐고 욕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할까?”

“그래, 그냥 하자”

“망하면?”

“망하면 다시 심지 뭐”

“그것조차 망하면 목련나무 거름 줬다고 생각하자”

만약 방울토마토가 한 알이라도 열리면 주인집과 반반 나눠 먹자고 말했다. 망하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심다 보면 하나쯤 열릴지도 모르니까. 텃밭은 스티로폼 박스보다 훨씬 깊고 넓으므로 실패 몇 번쯤 충분히 덮어 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텃밭에서는 목련나무가 자란다. 봄이면 틀림없이 꽃 피는 목련나무 덕에 어쨌든 우리의 텃밭은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에게 망해도 괜찮은 것이 생겨 기뻤다. 망해도 괜찮다는 이상한 안심은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용기이기도 하니까.

강이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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