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마스크 기부와 사재기

입력
2020.02.19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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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에 각자도생 바이러스 창궐

얼굴 없는 천사들 마스크 기부, 큰 울림

이웃 배려하는 백신, 악성코드 퇴치할 것

제주 마스크 기부 독지가의 편지. 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 제공
제주 마스크 기부 독지가의 편지. 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 제공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웃들이 품귀 현상으로 가격이 폭등해 마스크도 써보지 못하고 감염증에 노출되는 슬픈 현실을 막아보고 싶습니다.”

지난 1일 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에 마스크(KF94) 1만5,000개를 기부한 이가 건넸다는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신을 ‘자영업을 하는 제주시민’이라고 소개한 이 독지가는 “신분 노출을 원하지 않는다”며 협의회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는 대신 제3의 장소에서 마스크를 전달했다. 편지도 필적을 숨기려고 A4 용지 한 장에 컴퓨터로 작성했다.

이 제주 자영업자의 착한 마음은 주변을 ‘감염’시키면서 또 다른 기부도 낳았다. 19일 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에 따르면 마스크 기부 사연이 알려진 뒤 대한한돈협회가 4,500만원 상당의 돼지고기를 보내 왔다. 고기는 취약계층과 아동ㆍ청소년 시설에 배분됐다. 협의회 관계자는 “기부 실적이 확 늘어난 건 아니지만 어려운 시기를 나눔으로 함께 이겨 내자는 기부자의 뜻에 동참하고 싶다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여주시에 마스크 구매비 1억원을 기탁한 이남림씨의 손편지. 여주시 제공
여주시에 마스크 구매비 1억원을 기탁한 이남림씨의 손편지. 여주시 제공

제주에서 시작된 마스크 기부 물결은 뭍으로도 상륙했다. 지난 10일 경기 여주시청 복지행정과엔 점퍼 차림의 40대 남성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다”며 5,000만원짜리 수표 2장과 손편지를 놓고 갔다. 마스크를 일괄 구입해 관내 취약계층에게 제공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손편지의 주인공은 자신을 ‘경기도에 사는 이남림’이라고 밝혔다. 73세의 이씨는 사실 ‘볼펜 장수 기부 천사’로 이미 몇 차례 화제가 된 이다. 젊은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볼펜과 만년필 장사를 했고 이후 경기도에 산 땅이 개발지역으로 편입되면서 거금을 쥐게 된 이씨는 2002년부터 60억원도 넘는 성금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과 수재민을 위해 기탁해 왔다. 여주시청 관계자는 19일 “아드님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지만 지정기탁신청서의 연락처도 빈칸으로 남긴 채 떠났다”고 말했다.

반면 한쪽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오히려 돈벌이 기회로 삼았다. 위장 업체를 세워 원가 10억원어치의 마스크 230만개를 매점매석한 뒤 2배 가까이 비싸게 팔아 13억원의 폭리를 취한 도매업자가 있었다. 인터넷에 마스크를 시세보다 싸게 판다는 글을 올려 이를 보고 연락해 온 사람들에게서 1억1,000여만원을 가로챈 사람이 검거되기도 했다. 마스크 재고가 있는데도 소비자들에겐 품절됐다고 속여 주문을 거부한 뒤 가격을 올려 다시 판 업체들도 적발됐다.

위기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면 안다. 한 사회의 수준과 국가의 실력도 위기 때 확인된다. 신종 코로나로 인한 공포감이 증폭되며 자신만 살겠다는 이기심의 바이러스도 창궐했다. 목숨이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각자도생만 횡행한다면 사회는 정글이 되고 가장 큰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를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어 주는 백신 같은 사람들이 더 많다. 제주의 기부와 여주의 선행은 우리 사회가 이기심의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이 있음을 웅변한다.

줄거리가 우한 폐렴 사태와 너무도 유사해 최근 역주행 중인 영화 ‘컨테이젼’도 백신 개발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들의 이타심에 주목했다. 감염 현장에 파견된 역학조사관(에린 미어스)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환자를 챙긴다. 바이러스 박사(이안 서스만)는 사명감 하나로 어렵게 개발한 백신을 제약회사의 거액 제의에도 무상으로 방역 당국에 건넨다. 바이러스에서 인류를 구하는 건 결국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다.

신종 코로나 사태가 지역사회 감염이라는 새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혈액 보유량이 부족하면 헌혈을 하겠다는 이들이 줄을 서는 게 한국 사회다. 이씨는 편지에서 “모두가 함께 건강하게 잘 살길 바라는 작은 뜻”을 피력했다. 이씨처럼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소외된 이웃을 챙기는 이타적 선행의 백신이 있는 한 우린 그 어떤 악성 바이러스라도 극복해 낼 것이라고 믿는다.

박일근 뉴스2부문장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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