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남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입력
2020.02.15 04:30
수정
2020.02.17 10:13
27면
당시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손흥민 월드 클래스(이하 월클)’ 논쟁이 한창이었다. 문제는 이 ‘월클’이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 이 논쟁이 수그러든 것은 손흥민이 발롱도르 최종 22위에 선정되며, 한국인들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공인’을 받았다고 여겨진 뒤부터였다. 사진은 2019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22위에 오른 손흥민. 프랑스풋볼 캡처
당시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손흥민 월드 클래스(이하 월클)’ 논쟁이 한창이었다. 문제는 이 ‘월클’이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 이 논쟁이 수그러든 것은 손흥민이 발롱도르 최종 22위에 선정되며, 한국인들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공인’을 받았다고 여겨진 뒤부터였다. 사진은 2019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22위에 오른 손흥민. 프랑스풋볼 캡처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길 원한다. 이걸 아예 이론으로 정립한 학자들도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인간 욕구 5단계 이론(Hierarchy of needs)’의 미국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다. 매슬로는 이 이론을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5가지 욕구가 있고, 여기에는 위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 신체와 감정의 ‘안전 욕구’를 추구하게 되고, 그 다음은 애정을 주고받고 관계를 맺길 원하는 ‘사랑과 소속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이 매슬로 이론의 토대다. 이 이론에서 최고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인데, 매슬로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존경의 욕구’를 바로 그 아래인 4단계에 올려두었다.

남에게 주목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인정 욕구는, 누군가에게는 명예욕이나 권력욕으로, 누군가에게는 단지 자신의 존재가 타인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라는 정도로 표출된다.

물론 모든 관심과 인정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왕이면 보다 우월하거나 제3자가 높게 평가하는 이들의 관심과 인정을 원한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의 평가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우리끼리 평가가 엇갈리던 대상이 해외에서 크게 인정받는 일이 벌어지면 급격한 태세 전환이 이뤄지는 것도 그래서다. “이 사람이 그 정도였어?” 대상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지만, 나(우리)보다 더 뛰어나다 여겨지는 누군가의 평가에 따라 대상의 가치가 달리 보인다.

축구에는 발롱도르(Ballon d’or)라는 상이 있다. 전 세계 기자들의 투표로 매년 1명씩 선정되는 수상의 면면은 이름만으로도 화려해서, 요한 크루이프, 지네딘 지단 같은 클래식 스타들부터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이르는 현역 스타들을 망라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 스타 손흥민이 지난해 이 상의 최종 후보자에 이름을 올렸을 때 국내 팬들의 반응은 몹시 뜨거웠다. 당시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손흥민 월드 클래스(이하 월클)’ 논쟁이 한창이었다. 문제는 이 ‘월클’이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이다. 국내에서 이 논쟁이 수그러든 것은 손흥민이 발롱도르 최종 22위에 선정되며, 한국인들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공인’을 받았다고 여겨진 뒤부터였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달아 큰 상을 받게 되자, 과거 그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정권에 몸담았던 이들조차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는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기생충’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한국인 배우들을 기용해, 한국어를 사용하여 제작한 영화다.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려면 작품에 쓰인 언어와 영화적 배경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정작 한국 땅에서 압도적 권위를 획득한 것은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 행렬 이후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꼽히면서도 - 봉 감독의 농담처럼 – ‘로컬’이라 불릴 만큼 비영어권 영화에 엄격하던 아카데미 영화제가 봉 감독에게 무려 4개의 트로피를 선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권위있는 시상식의 경우는 사실 예외적이다. 국내 전문가들의 반복된 평가보다, 존재도 모르던 해외 누군가의 단순 언급이 힘을 얻는 풍경이 적지 않다.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대상에 대해, 해외 누군가의 호평이 있고서야 안도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다만, 남들의 평가에 나(우리)의 기준을 맞춰 충족시키는 인정 욕구보다, 우리 스스로 정한 기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자아 실현의 욕구가 더욱 가치 있다는 매슬로의 주장을 되새겨 보는 이유다.

서형욱 축구해설위원ㆍ풋볼리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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