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바꾼 법들] 엄마는 국회서 무릎 꿇었지만… “20대 국회 넘기면 자동 폐기”

입력
2020.02.17 04:30
수정
2020.02.17 11:5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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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회 문턱에 아직도 잠자는 법안들

어린이 응급조치 의무화 ‘해인이법’ 3년 넘도록 계류 중

통학버스 범위 확대 ‘태호ㆍ유찬이법’ 역시 무기한 대기

수술실 CCTV 의무화 ‘권대희법’도 의료계 반대에 막혀

지난해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각종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손 팻말을 들고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법안들을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후 ‘민식이법’ ‘하준이법’이 작년 말 국회를 통과했으나, ‘해인이법’ ‘태호ㆍ유찬이법’ 등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돼 있다. 이들 법안은 사실상 20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인 2월 임시국회(2월 17일~3월 17일)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각종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손 팻말을 들고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법안들을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후 ‘민식이법’ ‘하준이법’이 작년 말 국회를 통과했으나, ‘해인이법’ ‘태호ㆍ유찬이법’ 등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돼 있다. 이들 법안은 사실상 20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인 2월 임시국회(2월 17일~3월 17일)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연합뉴스

2016년 4월 14일 오후 2시 55분 경기 용인시 한 어린이집 앞. 하원버스에 오르던 이해인(당시 4세)양과 지도교사가 스포츠유틸리티 차량에 치였다. 사고 직후 행인이 119에 전화해 “사고가 났다”고 알렸지만 해인이에 대한 신고가 아니었다. 당시 행인은 몸집이 작은 해인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지도교사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만을 119 신고센터에 전했다.

어린이집 측이 119에 해인이 관련 신고전화를 한 시각은 오후 3시 2분쯤이었다. 최소 7분간 해인이 상태를 응급상황으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다. 첫 번째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차가 오후 3시 8분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구급대원은 지도교사보다 해인이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 해인이를 먼저 구급차에 태웠다. 그러나 해인이는 병원을 불과 300여m 앞두고 심정지 상태에 빠졌다. 차에 치이고 23~25분이 흐른 뒤였다.

이날의 기록은 해인이가 사고 발생 후 짧게는 7분간, 길게는 구급차에 타기까지 제대로 된 응급조치를 못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해인이 아빠 이은철(38)씨가 입수한 폐쇄회로(CC)TV 화면에도 담겼다. 이씨는 “사고가 나자마자 어린이집 교사가 해인이를 데리고 (어린이집)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 담임교사가 해인이를 안아서 원내로 데려가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고 소파에 앉혔다”고 설명했다.

해인이에 대한 초동 조치는 이게 전부였다. 이씨는 어린이집 측이 응급처치를 하기는커녕,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배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교사들이 신경을 안 썼어요. 조금 후에 아이가 소파 앞에 잠깐 서더니 픽 쓰러지더라고요. 그제야 아이를 밖으로 데려 나와 눕혔습니다. ‘아이가 의식은 있는데 눈이 돌아갔다’는 내용이 담긴 어린이집 관계자 녹취도 있어요. 그런데도 구급차 창문에 비친 실루엣을 보면 교사한테 안긴 아이 몸이 계속 흔들리더라고요. 장기가 파열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이 몸을 흔들었던 거예요.” 실제 해인이의 사망 소견은 ‘장기파열로 인한 과다출혈’이었다.

이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응급처치만 제대로 했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해인이법(어린이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이유다.

해인이법은 △어린이 안전담당 주무부처 명시 △안전사고 발생 시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의 응급조치 의무화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한다. 해인이가 숨진 지 4개월이 지난 2016년 8월 발의됐으나, 그로부터 3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최초 발의됐던 ‘어린이 안전기본법 제정안’은 “처벌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지적에 수정ㆍ보완됐고, 지난해 8월 다시 발의된 현재의 법안은 선거법 개정안 등을 둘러싼 여야 정쟁 탓에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28일 가까스로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법안이 의결됐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해인ㆍ하준ㆍ태호ㆍ민식이 가족이 국회를 찾아 의원들에게 무릎을 꿇고 어린이생명안전법안 통과를 호소한 덕분이었다. 이마저도 벌칙조항(어린이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에 이르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삭제된 채였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처벌조항 삭제는 법안소위 통과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향후 개정을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다만 법안소위 문턱을 넘었다고 해서 본회의 통과를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임위 전체회의 등의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20대 국회 임기 내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해인이법은 자동 폐기된다.

태호군의 아빠 김장회(왼쪽)씨와 해인양의 아빠 이은철씨가 지난달 14일 한국일보사 16층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태호군의 아빠 김장회(왼쪽)씨와 해인양의 아빠 이은철씨가 지난달 14일 한국일보사 16층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그나마 해인이법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태호ㆍ유찬이법(도로교통법 및 체육시설의 설치ㆍ이용에 관한 법 일부 개정안)’은 ‘정부의견 청취 필요’라는 이유로 무기한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지난해 5월 인천의 한 사설축구클럽을 다니던 김태호(당시 8세)군과 정유찬(당시 8세)군의 사망을 계기로 발의된 법안이다. 당시 태호와 유찬이를 태운 축구클럽 승합차는 인천 송도국제도시 한 아파트 앞 사거리를 지나던 중 다른 승합차와 충돌했다. 축구클럽 차량의 운전자 과실(속도ㆍ신호 위반)이 부른 사고였다. 태호군의 아빠 김장회(37)씨는 “육안으로는 여느 통학버스와 구분할 수 없는 노란 승합차였다”며 “그러나 사설축구클럽 승합차는 현행법이 지정한 어린이통학버스에 해당하지 않아 보호자 동승 의무 등의 안전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축구클럽의 승합차량을 ‘노란 폭탄’이라고 표현했다. “어린이통학버스 운전자는 안전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사고 운전자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대요. 또 동승자가 없다는 건 운전자를 감시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여서 과속이나 신호위반 같은 난폭운전에도 무방비 상태인 거죠.”

태호ㆍ유찬이법의 핵심은 모든 통학용 자동차를 어린이통학버스 신고대상에 포함시키자는 것이다. 현재는 체육시설 통학용 자동차 중 태권도ㆍ유도ㆍ검도 등 현행법에 명시된 15개 업종이 운영하는 자동차만 신고대상이다. 그러나 국회는 “통학버스 범위 확대는 정부가 안을 마련하라”며 행정부에 공을 넘겼다. 2월 임시국회 기간 중, 정부안을 마련하고 이를 다시 심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에 대해 법안을 발의한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간사들을 만나 최대한 법안 통과를 부탁하고 있다”며 “이번 임기 내에 처리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안 통과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태호 엄마 이소현(37)씨는 결국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했다. 이씨는 “처음 (민주당의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내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정치를 해 보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료사고 희생자인 고 권대희씨의 모친 이나금씨가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 의무화’를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 제공
지난해 4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료사고 희생자인 고 권대희씨의 모친 이나금씨가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 의무화’를 촉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환자단체연합회 제공

2016년 안면윤곽수술을 받다가 숨진 권대희(당시 25세)씨 의료사고(본보 13일자 9면)를 계기로 발의된 ‘권대희법(의료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법안 핵심 내용인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대희법은 지난해 5월 첫 발의됐다가 공동 발의자 10명 중 5명이 의사협회 입김으로 하루 만에 발의를 철회, 폐기되는 해프닝도 겪었다. 안규백 민주당 의원이 공동발의자 15명의 서명을 받아 재발의한 상황이다.

권씨의 모친 이나금(60)씨는 “이 법안은 수술대에 카메라를 비추자는 게 아니라, 출입구에 비춰서 무자격자가 수술실에 들어가는 등의 범법 행위를 예방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의사 입장에서도 의료사고 발생 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 아니냐”면서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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