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로맨틱코미디로 데뷔할 뻔… 절친 장준환과 ‘유령’ 각본 경쟁도

입력
2020.02.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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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카 봉준호’를 키운 충무로 초보시절 ‘봉준호 야사’ 

2006년 영화 '괴물' 개봉 직전 봉준호 감독이 영화 포스터 앞에서 장난기 어린 얼굴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6년 영화 '괴물' 개봉 직전 봉준호 감독이 영화 포스터 앞에서 장난기 어린 얼굴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스카 4관왕.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사 최고의 장면을 빚어냈지만, 그에게도 ‘올챙이’ 시절이 있었다. 단편영화 감독 시절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애를 먹은 적이 있고, 감독 데뷔라는 달디 단 열매를 따기 위해 쓰디 쓴 경쟁을 펼쳐야 했다. 운이 따르기도 했고, 구세주 같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봉 감독이 충무로 초보 시절 겪어야 했던, 그러나 그의 성장에 자양분이 됐을 ‘봉준호 야사’ 5개 장면이 있었다.

#1. 봉 감독이 1994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 단편영화 ‘지리멸렬’을 촬영할 때다. 어느 교수의 이중적인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교수연구실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스태프 중 한명인 정선영씨가 나서서 서울 충무로의 영화사 씨네월드 사무실을 확보했다. 당시 씨네월드에서 일하던 고 정승혜 전 영화사 아침 대표와 정씨의 친분이 작용했다. 정 전 대표와 정씨는 두 살 나이차이에도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씨네월드는 이준익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다. 정씨는 1995년 봉 감독과 결혼했다.

#2. 장편영화 감독 데뷔를 갈망하던 봉 감독은 1996년쯤 씨네월드에서 영화 1편을 준비하게 된다. 부인 정선영씨와 정승혜 전 영화사 아침 대표가 의기투합해 기획을 주도하고, 봉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제작자는 당시 씨네월드 대표였던 이준익 감독이었다. 영화 제목은 ‘오늘 꼭 죽어야지’. 신세를 비관하는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코미디였다. 6개월 정도 작업했지만 제작에 있어서는 모두가 초보였고, 결국 영화화는 무산됐다. 제작이 순조로웠다면 봉 감독은 로맨틱코미디로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렸을 뻔. 이 감독은 “봉 감독이 막 충무로 입문할 때니 의욕은 넘치면서도 자기 재능이 어디에 맞는지 잘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과 장준환 감독은 영화 '유령' 시나리오를 각자 쓰나 장 감독 시나리오가 채택된다.
봉준호 감독과 장준환 감독은 영화 '유령' 시나리오를 각자 쓰나 장 감독 시나리오가 채택된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영화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영화 '플란다스의 개'.

#3. 봉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로 절친한 사이인 장준환(‘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1987’ 등) 감독과 함께 1996년 영화 ‘모텔선인장’ 연출부에 들어갔다. 당시 제작사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가 두 사람을 눈여겨보고선 영화 ‘유령’(1999)의 시나리오를 각자 써보라고 경쟁을 붙였다. 봉 감독이 “그 동안 모아둔 돈이 있으니깐 1년치 생활비는 된다. 1년간 나는 올인하겠다”고 부인 정씨에게 말하자 정씨가 “좋다 못 먹어도 고!”라고 응답했던 시절이다. 봉 감독과 장 감독은 강원 원주의 외딴 아파트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승자는 장 감독. ‘유령’은 장 감독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4. 봉 감독은 차승재 대표와 함께 ‘플란다스의 개’(2000)로 데뷔를 시도하나 투자가 문제였다. 영화가 엎어지기 일보직전 차 대표는 충무로 파워맨인 강우석(시네마서비스 회장) 감독을 찾아갔다. 차 대표는 “돈이 좀 될 ‘화산고’(2001)와 돈이 안 될 ‘플란다스의 개’를 묶어서 투자해달라”고 말하자 강 감독은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투자 결정을 했다. 차 대표는 “투자금이 요즘 돈으로 200억원 정도였을 것”이라며 “강 감독이 봉 감독 데뷔에 일익을 한 셈”이라고 회고했다. ‘플란다스의 개’는 전국 관객 12만명에 그치며 흥행 참패했다.

#5. 봉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 흥행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2001년, 신생 영화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봉 감독을 찾아와 연출 제의를 했다.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 촬영 장소를 알아보던 때로 무명 감독임에도 차차기 작품 계약까지 하게 됐다. 최 대표는 봉 감독이 만든 첫 단편영화 ‘백색인’(1993)을 보고 오래 전부터 봉 감독을 점 찍어 둔 상황이었다. 봉 감독이 최 대표와 만든 영화는 ‘괴물’(2006)로 1,3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국내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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