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Wide] ‘정치1번지’ 종로의 정치학…텃밭을 거부한다

입력
2020.02.12 04:30
수정
2020.02.12 09:50
27면

※Deep&Wide는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오는 4월 15일 총선에서 ‘대한민국 정치1번지’ 종로에서 맞붙는 더불어민주당 이낙연(왼쪽) 전 국무총리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연합뉴스
오는 4월 15일 총선에서 ‘대한민국 정치1번지’ 종로에서 맞붙는 더불어민주당 이낙연(왼쪽) 전 국무총리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연합뉴스

민주화 이후 총선에서, 차기 대선 지지도 1위와 2위 주자가 같은 선거구에서 맞대결을 펼친 사례는 없었다.

이유는 많다. 첫째, 전체 싸움을 이끌어야 할 장수가 개별 선거구에 발목 잡히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둘째, 지휘관을 보호하는 것은 전략전술의 기본이다. 셋째, 차기 1위와 2위는 통상 정치적·지역적 기반이 상반되기 때문에 맞대결을 펼칠 지역구 자체가 드물다 등등.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이런 승부가 벌어지게 됐다. 전략적, 정치공학적 문제를 뛰어넘는 여러 유인(誘因)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 지역구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종로인가

종로는 왜 ‘정치1번지’로 꼽힐까? 일단 대한민국 정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서울 종로구를 ‘1번’으로 매기고 있다. 각종 행정 통계, 선거 투개표 현황 발표는 서울 종로부터 시작된다.

종로의 사회적, 정치적 기원은 조선이 건국된 시점인 600여 년 전에 닿는다. 조선의 물리적 실체인 한성의 중심인 경복궁 앞길로 조성된 곳이었다. 정치의 중심인 왕궁, 욱조 등의 행정 기관. 상업의 중심인 시전의 대동맥이 바로 종로였다.

파루와 인정을 알리는 종이 매달린 ‘길’로 시작된 종로에 지금 같은 행정구역의 위상을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일제다. 1943년 6월 조선총독부는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경성부를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성동구, 영등포구 등 7개 구로 편성했다. 명동과 충무로 등 일본인의 영향력이 컸던 곳에는 중구라는 이름이 붙고 조선의 전통과 영향력이 여전한 곳에 종로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흥미롭다.

사실 서울 외 다른 권역에도 ‘정치1번지’라 불리는 선거구들이 있었다.

대체로 조선시대 관찰사의 감영에서 도청소재지로 이어지는 수부(首府)도시의 중심으로 행정기관, 사법기관, 지역 명문고 등이 자리 잡은 곳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나 광주 동구가 대표적이다. 경남도청 등의 행정기관, 지방법원과 검찰청 등 사법기관, 경남고 등 명문학교가 자리잡은 ‘PK의 종로구’로 명실상부한 부산 ‘정치 1번지’였다. 그런데 이제 부산에선 아무도 서구를 ‘정치 1번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산 서구의 경우 1983년엔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했다. 1998년엔 이웃 중구에 있던 부산시청이 연제구로 옮겼다. 2001년엔 지방법원도 시청 옆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행정적 위상이 떨어지면서 지역 경제력도 하락했고 정치적 위상도 같이 떨어졌다. 도시 계획으로 구도심의 위상이 떨어진 다른 권역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제13대 총선을 열흘 앞둔 1988년 4월 16일 서울 종로구 창신국민학교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 몰려든 유권자와 선거운동원 등으로 북적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제13대 총선을 열흘 앞둔 1988년 4월 16일 서울 종로구 창신국민학교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 몰려든 유권자와 선거운동원 등으로 북적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종로구는? 1970년대 중반 경기고, 서울대 등 관내 명문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 했고 정부 청사들도 과천과 세종으로 옮겼다. 단일 선거구 유지가 겨우 가능한 16만 남짓의 인구에다가 면적도 서울 25개 자치구 중 두 번째로 좁다. 하지만 종로는 면적과 인구로 설명되지 않는 힘이 있다.

청와대, 국무총리 공관, 정부 서울 청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구까지 넓혀보면 서울시청, 한국은행과 명동, 남대문시장이 여전하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다양성 혹은 모순을 여전히 내포하고 있는 곳이 종로다. 중선거구 시절 종로와 중구는 한 선거구에 속했다. 경제개발을 상징하는 재벌기업 본사도 여럿이고 중소기업이라는 이름도 민망한 ‘마치코바’들도 여전하다. 강남 아파트들 보다 종부세를 훨씬 더 많이 내는 사람들은 평창동에 살고, 신흥 전문직들은 교남동 신축 아파트에 모여있다. 그리고 종로에는 쪽빵도 많다.

사실 종로의 ‘정치1번지’위상에 위협을 가한 곳도 있었다. 지금도 심심찮게 ‘신 정치1번지’ 소리가 나오는 서울 강남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강남구는 민심을 선도했다. 강남 개발의 효과가 나타나던 1980년 중반부터 강남의 정치적 위상은 달라졌다. 중선거구제였던 1985년 12대 2ㆍ12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를 떨어뜨리고 신민당, 민한당 후보를 동반 당선시켰다. 소선거구제로 회귀한 이후인 13, 14대 총선에서도 강남에선 여야가 균형을 이뤘다. ‘학력과 경제력 등 유권자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그렇게 되니 민정계 정당, YS계 정당, DJ계 정당 모두 에이스를 출전시켜 총력을 다했다. 선거전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황병태, 홍사덕 등이 강남에서 주목받은 정치인들이다. 하지만 3당 합당으로 보수와 중도(보수)가 손을 잡자 그 쪽 진영의 텃밭이 되어버렸다. ‘누가 나가도’ 뻔한 지역이 되어버리면서 전략적 가치도 떨어졌다.

그렇다면 종로는? 제헌의회 때부터 줄곧 민심과 정치상을 반영해온 곳이다. 제헌의회나 2대 선거에선 여야를 나누기 어려웠지만 종로 지역구는 거물급 정치인들을 연달아 배출했다. 1공화국 종로 출신 국회의원들 중에선 장면, 박순천, 윤보선 등이 눈에 띈다. 한국 정치의 주요한 특징이 여촌야도(與村野都)라고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전까지 여당은 종로에서 단 한 사람의 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로 바뀌어 종로와 중구가 합쳐진 뒤에야 비로소 여당이 동반 당선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 때 여당 인물도 장기영, 민관식, 이종찬 등 중량감 높고 합리적 이미지를 갖춘 인사들이었다.

민주화의 서막이었던 1985년 2ㆍ12 총선에선 민정당 이종찬과 신민당 이민우가 함께 당선됐지만 3등 낙선자 정대철과 1위 당선자 이종찬의 득표율 차이는 5%포인트에 불과했다.

물론 ‘민주화 이후’ 보수 정당 당선자 숫자가 더 많은 점 때문에 “종로가 보수에 유리하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실제로 1988년부터 종로 당선자는 이종찬(13대, 민정당)-이종찬(14대 민자당)-이명박(15대 신한국당)-노무현(15대 보궐, 새정치국민회의)-정인봉(16대, 한나라당)-박진(17대, 한나라당)-박진(18대 한나라당)-정세균(19대, 민주당)-정세균(20대, 민주당)이었다.

13대(1988년)부터 18대(2008년)까지는 보수적이었던 지역이 19대부터 돌아선 것일까? 구체적 숫자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이종찬 당선자의 득표율은 약 38%에 불과했다. 당시 야당 후보가 난립했던 것. 14, 15, 17대 총선에서도 보수정당 당선자의 득표율은 나머지 정당 후보자들의 합에 한참 못 미쳤다.

실질적으로 1대 1구도로 승부가 진행된 것은 16, 18, 19, 20대 선거 정도인데 앞의 두 번은 보수정당이 뒤의 두 번은 현 여권이 승리했다. 즉, 종로는 1950~60년대 독재 시대에는 항상 야당을 뽑았고 선거 제도가 중선거구제로 바뀐 이후에는 여와 야를 함께 뽑았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혼전 양상’이었던 셈이다.

[저작권한국일보]서울 종로지역 역대 총선 개표-박구원기자/2020-02-11(한국일보)
[저작권한국일보]서울 종로지역 역대 총선 개표-박구원기자/2020-02-11(한국일보)

변치 않는 종로의 힘

이 기록들이 바로 종로의 힘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종로가 다시 주목 받는 이유는 이런 ‘레거시’ 때문이다. 물론 종로가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는 많다. 구름 인파가 운집하는 합동연설회의 시대가 사라진 지 오래다. 유진오, 이민우의 사자후가 정국 풍향계를 바꾸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철권 시대도 아니다. 경제적, 문화적 권위는 한강 남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하지만 종로는 종로다. ‘효순·미선 추모 집회’,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같이 21세기 들어 시작된 촛불 집회의 무대도 광화문 광장이었다. 집회 기준으로 보면 요즘 광화문의 주인은 보수 쪽이다. ‘태극기’로 시작된 광화문 보수 집회는 지난 해 10월 ‘조국 규탄’ 집회에선 무시하지 못할 확장성도 보였다.

종로의 대통령 지지율, 정당 지지율도 전국 평균, 서울 평균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시대의 선도자 역할에선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누구의 텃밭이 아닌 종로는 여전히 민심과 정서의 풍향계,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맡고 있다. 종로에선 진보도 어색하지 않고 보수도 어색하지 않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 D.C를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라고는 하지만 ‘정치1번지’라고 부르진 않는다. 강고한 민주당 텃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윙스테이트라고 해서 오하이오나 버지니아, 플로리다 같은 곳을 정치1번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20세기 말미에, 종로는 이명박과 노무현을 차례로 국회에 보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21세기를 시작하며 종로 출신 전직 국회의원 두 사람을 차례만 바꿔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낙연이 일찌감치, 황교안이 뒤늦게 종로로 행보를 결정한 이유는 이렇게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차기 대통령 지지율 1위와 2위가, 거대 양당의 대표선수가 맞대결할 수 있는 지역구는 서울 종로뿐이다. 그래서 정치 1번지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더모아 정치분석실장

윤태곤 실장은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대선, 서울시장선거 등에 참모로 직접 참여했고 국회에서도 일했다. 현재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에서 위기관리와 캠페인 전략을 컨설팅하며 방송과 매체를 통해 한국정치를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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