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벨트를 가다] 진짜 안티구아 커피를 만나다

입력
2020.02.12 09:33

<22회> 아구아 화산 산기슭의 커피농가들

아구아 화산 중턱의 커피 밭. 평지의 농장과 달리 산중간의 커피는 소농들에 의해 경작된다. 농부인 티모테오씨 머리위로 차광나무로 많이 사용되는 호코떼의 열매가 매달려 있다. 최상기씨 제공
아구아 화산 중턱의 커피 밭. 평지의 농장과 달리 산중간의 커피는 소농들에 의해 경작된다. 농부인 티모테오씨 머리위로 차광나무로 많이 사용되는 호코떼의 열매가 매달려 있다. 최상기씨 제공

이튿날 아침 무거운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커피 산지에서는 대부분 쾌청한 날씨만 봐 온 터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스마트폰의 날씨 정보를 확인하니 일주일 내내 비가 예보돼 있다. 비 오는 날의 산지 방문은 쉽지 않다. 특히 과테말라의 커피 농장들은 대부분 가파른 산악 지역에 위치해 있어 차가 진창에 빠지기도 하고, 무너져 내린 토사로 길이 막히기도 한다. 농장 안에서도 산 기슭을 헤치고 오르기 어려워 헛걸음하고 나올 때도 있다.

과테말라는 5월부터 9월까지 우기다. 이 기간 동안 커피나무는 습기를 빨아들여 열매를 만들기 위한 충분한 영양분을 비축한다. 농장을 방문한 시기는 수확철인 건기가 끝나고 우기로 접어든 시점이어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예상했지만,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니 시기를 잘못 정한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올려보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데 과테말라 친구들은 염려하지 말라는 눈치다. 기상예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가랑비 정도 내릴지 몰라도 일주일 내내 비가 오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놀랍게도 이 말은 맞았다. 과테말라를 떠나올 때까지 새벽에 잠시 비가 내렸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 비가 내리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들이 더 많았다.

과테말라를 비롯한 중미의 커피 산지에는 ‘미세기후(Micro Climate)’라는 것이 있다. 매우 좁은 지역으로 날씨가 다르다는 의미다. 학교 운동장에는 비가 오는데, 뒷마당은 해가 쨍쨍한 경우도 있다. 농장을 방문할 때도 스산한 바람에 점퍼를 꺼내 입었다가 따뜻한 온기에 금세 벗어 젖히길 반복했다. 산세가 가팔라 좁은 지역에 따라 고도와 기온, 강우량이 제각각이다. 그래서 한 농장에 심어진 같은 품종의 커피라 하더라도 식재 위치에 따라 커피 맛이 조금씩 다르다. 커피 농장에서는 촘촘히 구역을 나누어 롯트(Lot)별로 나무를 관리한다. 과테말라의 커피에 대한 풍미의 전형성을 얘기하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날 과테말라 친구들과 함께 향한 곳은 시우다드 비에하(Ciudad Vieja)라는 작은 도시였다. 안티구아에서 차로 20분가량 아구아 화산 쪽으로 더 들어가면 산자락 1,550m쯤의 고도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인구 3만명의 작은 소도시지만, 이 곳은 16세기 과테말라의 수도였다. 1541년 아구아 화산이 폭발하면서 도시는 폐허가 됐고, 수도는 바로 옆 안티구아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지진으로 현재의 과테말라시티로 이전됐다. 시우다드 비에하는 오래된 도시라는 뜻이다.

이 도시 가구 중 약 80%는 커피 농사를 짓거나,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한다. 비교적 평지인 안티구아가 규모가 크고 자본력 있는 농장들이 많다면, 언덕배기 이 도시 주변의 커피 밭은 대부분 영세한 농민들이 경작한다. 커피는 마을에서 아구아 화산 정상 쪽으로 좀 더 올라가 해발 1,600m부터 2,200m 사이의 언덕에서 주로 재배된다.

마을 초입에서 미리 약속한 티모테오(Timoteo)씨를 만났다. 아르떼사날 산미구엘(Artesanal San Miguel) 카페라는 이름의 커피 협동조합의 설립자다. 이 마을 대부분의 농가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생산자 조합을 결성해 서로 협력한다. 이 도시에는 24개의 커피 생산자 조합이 있다. 조합은 농민들이 생산한 커피를 공동으로 가공하고, 조합 이름으로 판매한다. 이 조합에는 3명의 여성을 포함해 모두 28명의 농민들이 회원으로 참여한다. 조합은 농민들이 수확한 커피를 모아서 판매하지만, 바이어가 원하면 생산지 고도별, 또는 품종별로 나누어 팔기도 한다. 티모테오씨는 4헥타아르(㏊)정도의 농지에서 매년 5톤가량의 커피를 수확한다. 커피가 가장 중요한 작물이지만, 아보카도, 복숭아, 호꼬테(Jocote) 등의 과수 농사도 함께 한다.

그의 농장은 해발 1,950m 높이에 있었다. 4륜 구동이 오를 수 있는 곳까지는 차로, 그 이후 좁은 산길은 걸어서 이동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뒤를 따랐다. 매일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오르는지 물으니 평상시엔 말을 타고 올라온다고 답했다. 말이나 나귀는 수확한 커피를 실어 나르는 고산지 커피 농사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듬성듬성 불규칙하게 심어진 커피나무 위로는 매실처럼 생긴 열매가 달린 나무가 커피로 가는 햇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호꼬테라는 과실수로, 이 열매가 익으면 시장에 내다 판다. 커피를 재배하는 동시에 호꼬테도 수확하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커피나무에는 붉은 색을 칠한 페트병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뚜껑이 없는 플라스틱 병 안에는 알코올이 들어있다. 티모테오씨에게 병의 용도를 물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벌레를 잡기 위한 덫이라고 설명한다. 성충의 길이가 1.5㎜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딱정벌레는 커피 열매에 구멍을 뚫는다는 의미로 ‘커피베리보러(Coffee Berry Borer)’라 불린다.

크기는 작아도 이 벌레가 커피농가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가장 큰 피해는 낙과다. 암컷은 체리에 구멍을 내고 들어가 알을 낳는데 이때 커피 열매가 떨어지기도 한다.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들은 커피 콩을 먹고 자란다. 외견상 구멍이 뚫린 생두는 이 벌레의 공격을 받았다는 증거다.

매년 커피베리보러가 전 세계 커피 농가에게 주는 폐해는 수 천억 원 대에 이른다. 때문에 벌 등 천적을 이용하기도 하고, 가지치기나 열매를 제거해 벌레가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등의 경작방식으로 구제하기도 한다. 물론 화학 약품을 쓸 수도 있지만, 벌레가 커피 체리 안에 들어있어 효과적이지 못하고 자칫 살충제가 열매 안으로 스며들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과테말라의 소농들은 살충제 대신 플라스틱 통으로 벌레를 유인한다는데,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을로 내려온 후, 티모데오씨는 조합의 공동 가공시설과 로스팅 설비를 보여줬다. 생두 세척을 위한 수도시설과 건조기계 등을 갖춘 워싱 스테이션은 한 눈에 봐도 매우 영세했다. 이 좁은 시설에서 28가구가 재배한 커피를 모두 처리한다고 하니, 농가들의 생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 남았다. 가공시설 한 쪽에는 실내 사이클 운동 기구처럼 생긴 기계가 놓여있었다. 티모테오씨에게 용도를 물어보니 커피 열매의 과육을 벗겨내는 기구라고 한다. 자전거에 붙은 바구니에 수확한 열매를 넣고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아래로 커피 과육과 생두가 따로 떨어져 내려오는 원리다. 커피 가공도 하고, 운동도 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라움이 들었지만, 이런 장비를 사용할 만큼 적은 생산 규모에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조합의 한 쪽에서는 십대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한창 로스팅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대부분 조합원의 자녀들이다. 농민 조합원들의 생활은 열악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들의 생업을 이어받고 있다. 물론, 어린 농부들의 꿈은 얼마 안 되는 농토를 물려받는 수준이 아니겠지만.

실내 자전거 운동기구처럼 생긴 커피 펄퍼. 바구니에 커피 열매를 채우고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과육과 씨가 분리되어 내려온다.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열악한 생산규모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최상기씨 제공
실내 자전거 운동기구처럼 생긴 커피 펄퍼. 바구니에 커피 열매를 채우고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과육과 씨가 분리되어 내려온다.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열악한 생산규모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최상기씨 제공

안티구아는 오랫동안 과테말라 커피의 대명사였다. 에티오피아의 이르가체페나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처럼 전 세계 커피 애호가들에게는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될 만큼 유명한 커피 산지다. 과테말라의 다른 지역 커피들도 안티구아라는 이름을 붙여야 판매가 용이했기 때문에 과거 수십 년 동안 안티구아는 과테말라 커피와 동급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중대형 농장들로 구성된 안티구아 커피 생산자 연합은 이 지역에서 생산된 커피에 ‘진짜 안티구아(Genuine Antigua)’라는 인증서를 발행해 다른 지역 커피들과 구별했다. 해외의 바이어들은 이 인증서가 붙은 커피들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고, 그만큼 비싼 가격을 주고 구매해갔다.

그러나 안티구아 생산자 조합은 고도가 낮은 지역의 중대형 농장들의 연합체였고, 산 중간의 소규모 재배 농가들이 비싼 인증서를 받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진짜 안티구아 커피를 생산하면서도 제대로 그 대우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21세기 들어 커피 소비국에 불어 닥친 스페셜티 커피 문화는 과테말라 커피 농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스모키하면서 다소 무거운 바디감 대신 꽃향과 달콤한 체리의 풍미가 선호되면서 우에우에테낭고 등 높은 고도에서 재배된 산미가 부각된 커피들이 고급 커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컵 오브 엑셀런스(Cup Of Excellence) 등 해외 소비국의 심사위원들이 주축이 된 커피 품평대회에서도 안티구아 지역 커피들이 외면을 받으면서 안티구아는 인증서까지 발행하면서 차별을 꾀했던 과거의 영예에서 멀어지게 됐다. 그런데 권토중래(捲土重來)라 했던가. 최근 안티구아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특히 그 대상은 저지대 중대형 농장들의 커피가 아니라, 아구아 산 중간의 가파른 언덕에서 재배한 영세 농가들의 커피라는 점이 눈에 띈다. 비록 재배 환경은 열악하고, 생산 규모도 초라하지만, 높은 고도의 지리적 조건이 외려 스페셜티 커피가 지향하는 속성에 부응하면서 증명서 하나 없는 진짜 안티구아 커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과테말라를 떠나기 전 여러 농장에서 받은 커피들을 한자리에 놓고 블라인드 태이스팅을 진행했다. 가장 눈에 띈 커피는 농장 이름이 아닌 안티구아 영세 농민조합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던 컵이었다.

18세기 중반 과테말라에 커피가 전해진 이후부터 산 중간을 개간해 커피를 재배해온 가난한 커피 농가들. 그들은 화산재가 뒤 덮인 산기슭을 뒤져 커피나무를 심고, 훌륭한 안티구아 커피를 생산해 냈다. 국제적 명성의 부침과 상관없이 그들의 가난과 고된 일상은 대를 이어 왔고 또다시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고 있지만, 진짜 안티구아 커피는 살아 꿈틀대는 아구아 화산 산구릉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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