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오스카의 콧대

입력
2020.02.11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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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에 호명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받으며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에 호명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트로피를 받으며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아카데미는 적절한 기준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누구라도 돌려보낼 권리가 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최근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 포함된 문구다. 턱시도나 우아한 어두운 색 정장 또는 드레스를 입지 않은 기자는 AMPAS가 운영하는 기자실 출입을 불허한다는 경고다. 내용은 구체적이어서 검은색이라도 스니커즈는 안 되며, 블랙진을 입어도 안 된다. 드레스는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길이여야만 한다.

□ 세계 최고의 칸 국제영화제도 초청작 공식 상영회 때 복장 규정이 까다롭다. 상영관에 들어서는 남성은 누구든 검은색 정장 또는 턱시도에 보타이가 필수다. 여성은 드레스를 입어야 상영관 입장이 가능하다. 칸 영화제는 영화를 만든 이들에 대한 예우를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기자실 기자들에게까지 까다로운 복장 규정을 들이밀지는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의 다른 문화적 배경도 작용했겠지만, 아카데미는 92년 된 축제의 권위를 엄격한 복장 규정으로 드러내고 싶은지도 모른다.

□ 아카데미상은 미국 영화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다. 수상은 명예와 함께 비즈니스 기회를 안긴다. 배우든 감독이든 스태프든 수상을 하면 몸값이 훌쩍 뛴다. 무명에 가깝던 배우 브리 라슨은 2016년 ‘룸’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스타로 발돋움했고, 마블의 블록버스터 ‘캡틴 마블’(2019)의 주인공을 꿰찰 정도로 정상급 배우가 됐다. 미국 영화사들이 돈을 쏟아부어 정치권 선거전을 방불케 하는 홍보전을 펼치며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려는 이유다.

□ AMPAS는 미국 영화인들의 이익을 위해 설립된 조직이다. 할리우드가 세계를 대상으로 영화를 만든다지만, AMPAS는 태생적으로 해외 영화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AMPAS 회원 투표로 수상자(작)를 선정하는 아카데미상도 미국 영화, 적어도 영어 영화를 더 선호한다. 최근 회원의 인종과 국적, 성별 다양화에 노력한다지만 여전히 백인 남성이 주류다. 그럼에도 ‘기생충‘이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외국어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손에 쥐었다. 오스카의 콧대를 꺾은 게 한국 영화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로스앤젤레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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