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 Wide] 영국 잃은 EU, 자유무역ㆍ기후위기 대응으로 정체성 찾기

입력
2020.02.05 16:57
수정
2020.02.05 21:46
27면

※Deep&Wide는 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영국이 1월31일 오후 11시 EU를 공식 탈퇴하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스토몬트 외곽에서 열린 기념 집회 참가자들이 국기를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벨파스트(영국)=AP 뉴시스
영국이 1월31일 오후 11시 EU를 공식 탈퇴하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스토몬트 외곽에서 열린 기념 집회 참가자들이 국기를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벨파스트(영국)=AP 뉴시스

길고 험난했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가 1월31일 마침내 단행됐다.

이날 저녁 런던의 의사당 웨스트민스터 광장에서는 성대한 축하행사가 열렸다. 영국 각지에서 온 수 만 명의 시민들은 ‘독립일’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기쁨을 만끽했다. 이들은 EU에서 벗어나 다시 주권을 되찾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반면 브렉시트에 반대했던, ‘원하지 않는 이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은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부르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지난달 29일 유럽의회에서 브렉시트 조약이 승인된 후 영국의 유럽의회 의원들이 동료 의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장면도 보였다.

영국도 영국이지만, 하나의 유럽을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진을 거듭해왔던 EU로서도 충격은 클 수 밖에 없다. EU는 브렉시트의 악몽은 뒤로 하고, 이제 새로운 정체성 구축을 앞장서고 있지만 힘이 부쳐 보인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여정

지난 3년 반 동안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정치경제에 큰 불확실성을 안겨 주었던 브렉시트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겨우 1막이 끝났을 뿐이다. 영국은 올해 안에 EU 27개 회원국(EU27)과 신관계협상(경제 및 정치외교안보)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2막이 끝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신관계가 제대로 작동되어야만 영국의 EU탈퇴는 3막까지 종결된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기나긴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EU의 규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려 한다. 12월31일 종료되는 과도기(이행기)를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렇게 되면 향후엔 영국과 EU간에 낮은 수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유력하다. EU 회원국이었을 때 영국은 무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EU와의 교역을 무관세로 해왔는데 낮은 수준의 FTA가 체결된다면 당연히 무역장벽이 세워질 터이고 영국 경제는 손실이 클 것이다.

반면 이런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대체시장 확보에는 최소한 몇 년 걸린다. 영국의 대미 무역은 대EU의 1/3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미국 우선정책을 내세우며 재선 국면에 들어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에게 유리한 FTA를 체결해줄 가능성은 아주 낮다. 더구나 트럼프는 영국과의 FTA협상에서 영국의 건강보험(NHS)시장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은 이건 의제가 아니라고 펄쩍 뛴다.

브렉시트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브렉시트 일지. 그래픽=김대훈 기자

애초 영국은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독립적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1961년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을 신청했다. 1973년 EEC 회원국이 된 이 섬나라는 자유무역 확대 등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런데 경제적 손실을 감내하고서라도 정체성을 훨씬 더 중시하겠다는 것이 바로 브렉시트다. 21세기 20년대,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위상은 60년 전과 비교해 많이 하락했다. 중국이 G2의 하나로 부상했고 인도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상황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영국은 ‘독립’을 해서 국제적인 위상을 재확립하려 한다. 해도가 없는 바다를 항해하려는 격이다.

일부 유럽 의회 의원들이 브렉시트 절차의 최종 입법 단계인 영국의 EU 탈퇴에 대한 투표가 끝난 후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일부 유럽 의회 의원들이 브렉시트 절차의 최종 입법 단계인 영국의 EU 탈퇴에 대한 투표가 끝난 후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EU의 미션 ① 자유무역

브렉시트는 지역통합의 모범을 보여왔던 EU가 자발적으로 분열된 첫 사례이다.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를 결정했을 때부터 EU의 최우선순위는 구심력 강화였다. 2010년 그리스에서 시작된 경제위기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로 확산되면서 여러 회원국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세력이 대두됐고, 브렉시트 결정은 이런 세력 확장에 기름을 부었다. 이후 브렉시트가 3년 반이 넘도록 이루어지지 못하고 영국이 극도의 혼란상을 보이자 반(反)유럽을 외쳤던 일부 포퓰리스트 정치세력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2017년 1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후 EU는 자유무역 질서의 수호자로서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해왔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주의를 혐오하며 양자주의를 우선한다. 2차대전 후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자유무역질서를 구축한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은 건설자가 앞장서서 이 질서를 파괴하는 중이다. 트럼프는 2018년 중국에 이어 EU와도 통상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WTO의 분쟁해결기구 상소위원 임명을 거부해 지난해 12월 초부터 이 기구는 기능정지상태가 됐다. EU는 2018년부터 계속해서 이 기구의 개혁방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EU는 대안으로 WTO에서 퇴임한 상소위원을 무역 분쟁 해결에 활용하고 있다. 2017년 FTA를 체결한 EU와 캐나다는 양국의 무역 분쟁을 이들에게 맡기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에 대해 일본이 WTO에 제소한 분쟁에서, 지난해 4월 상소심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 기구의 판정에 불복하면 승소국이 무역 보복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사실상 이 기구를 기능 정지시켜 국가 간 통상분쟁을 조정하는 게임의 규칙이 무너지고 말았다.

EU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질서가 점차 무너지는 이행국면에서 오히려 FTA 체결에 적극 나서 성과를 거뒀다. EU27은 지난해 7월 중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Mercosur)와 FTA 협상을 타결했다. EU27 인구는 약 4억 5천만명, 메르코수르의 인구까지 합치면 7억 명 정도의 거대시장이 된다. 앞서 지난해 2월에는 EU와 일본 간의 FTA가 발효되었고, 2018년 초부터 EU는 호주 및 뉴질랜드와의 FTA 협상을 진행중이다.

2001년 WTO에 가입한 중국은 세계시장에 편입되어 고속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WTO 체제가 다소 중국에게 유리하다고 여겨 이를 개혁하려면 미국과 EU가 힘을 합쳐 중국을 압박하는 게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국내 지지자 규합이 우선이고 다자주의를 경멸하기 때문에 EU의 공동개혁 요구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월 23일 백악관에서 마이크 펜스(왼쪽) 부통령과 참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월 23일 백악관에서 마이크 펜스(왼쪽) 부통령과 참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EU의 미션 ② 기후위기대응

EU는 아울러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 중이다. 지난달 12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이사회(EU 회원국 수반들의 정상회담)에서 EU의 그린딜(Green Deal)이 사실상 합의에 도달했다. 2050년까지 유럽을 세계 최초의 탄소중립적인 대륙으로 만들고,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도와 비교해 50~55%로 줄이는 방안에 대해 대체적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미 유럽투자은행(EIB)은 2021년까지만 화석연료 투자를 지원한다고 발표한 상태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도 향후 10년 간 1조 유로(약 1300조 원)를 기후위기 대응에 투자키로 했다.

기후위기 대응책은 또 통상정책과도 연계된다. EU는 유엔에서 합의된 기후변화조약을 준수하지 않는 국가의 물품이 EU로 수입될 경우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바로 ‘탄소 국경세’인데, 내년까지 구체적인 안이 나올 예정이다.

사실 기후위기 대응에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또 인류 공동의 문제이기에 모든 국가가 나서야 위기 대처가 효과가 있다. 파리기후변화조약을 탈퇴중인 미국은 EU의 이런 조치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보복 조치를 경고했다. EU는 또 기후위기 대응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과는 FTA를 체결하지 않을 계획이다.

EU가 자유무역 질서를 수호하려 하지만 혼자 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G2의 하나로 급부상한 중국이 EU와 함께 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질서를 선별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존 국제질서를 고치려는 수정주의 세력이다. 이와 관련,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지정학의 대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중국의 부상에 대한 전략으로 ‘서구’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주연, 유럽 조연’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국가들을 ‘서구’에 포용해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충고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로 대외무역의존도가 70%가 넘는 우리나라는 다자주의 자유무역 질서 유지에 힘을 모아야 한다. EU가 앞장선 자유무역 유지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또 우리가 회원국으로 있는 세계 주요 20개국(G20) 채널도 활용할 수 있다. G20내 중견국협의체인 믹타(MIKTA: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에서 한 목소리로 자유무역을 주창할 수도 있다. 양자 채널은 물론이고 다자 외교 틀도 적극 가동해야 할 것이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안병억 교수는 연합뉴스ㆍYTN기자 출신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국제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학술활동 외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을 직접 제작ㆍ진행하면서 상세한 유럽소식을 국내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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