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인공 지능의 첫 승리(2.10)

입력
2020.02.10 04:3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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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BM 슈퍼컴퓨터 '딥 블루'와의 재대결에서 패배한 채스 챔피언 카스파로프. 그의 체스 역정은 냉전과 냉전 이후 문명사의 한 상징이라 할 만하다. AP 연합뉴스
1997년 IBM 슈퍼컴퓨터 '딥 블루'와의 재대결에서 패배한 채스 챔피언 카스파로프. 그의 체스 역정은 냉전과 냉전 이후 문명사의 한 상징이라 할 만하다. AP 연합뉴스

IBM 슈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가 1996년 2월 10일 구 소련의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 1963~ )에게 첫 승리를 거뒀다. 그 대국은 3승 2무 1패로 카스파로프가 승리했지만, 한 해 뒤인 97년 5월 대결에서는 2승 3무 1패로 딥 블루가 승리했다. 소비에트가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냉전시대, 흑백의 체스 판은 동서 진영의 상징적 대결 무대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형 인간과 공산 체제의 ‘새롭게 개조된’ 인간의 두뇌 격돌. 구 소련은 각종 대회를 독려하며 체스 대중화에 열을 올렸고, 엘리트 체스 선수들을 집중 육성했다.

1927년 시작된 격년제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구 소련 대표단은 48년 소련 챔피언 시대를 연 마하일 보트비니크를 비롯, 1952~90년 19차례 출전해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체스 챔프들을 압도하며 완승을 거뒀다. 그 주역이 카스파로프였다.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카스파로프는 어려서부터 체스에 발군의 재능을 보이면서 10세 무렵 러시아 세계 챔프 미하일 보트비닉에게 발탁됐다. 체스는 ‘게임’을 넘어 이념의 우위를 확증하는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는 만 22세이던 1985년 당시 챔프 아나톨리 카르포프를 꺾고 국제체스연맹(FIDE) 공인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됐다. 그 해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했다.

카스파로프는 93년 불화 끝에 연맹에서 탈퇴, 별도의 프로체스협회(PCA)를 설립했다. 하지만 2000년 블라디미르 크램닉(Vladimir Kramnik)에게 패할 때까지 부동의 챔프였고, 2005년 은퇴할 무렵에도 승률 세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물론 그 무렵엔 이미 국가ㆍ당 차원의 열정적 환대는 없었다.

소비에트의 영웅이 아닌 고독한 천재였던 그가 체제의 대표가 아닌 인간 대표로 인공지능과 격돌한 것도, 결국 패배한 것도, 문명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IBM의 대화형 AI 프로그램 ‘왓슨’은 2011년 미국 유명 TV퀴즈쇼 ‘제퍼디’의 전설적 승자 두 명과 대결해 싱겁게 승리했고, 2016년 바둑의 ‘알파고’로 이세돌을 꺾었다.

철학자 김진석은 최근 펴낸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글항아리)이란 책에서 인간 강화의 도정에서 마주한 인공지능 시대가 역설적으로 개인의 실존을 위협하는 현실, ‘인간 잉여’의 불안을 스산하게 대비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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