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반발로서의 배제전략, 새로운 남북관계

입력
2020.02.03 04:30
31면
남북관계를 번역하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으로 ‘번역’되는 남북관계는 오히려 상상력의 족쇄가 될 수 있다.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경제주의’, 과거 패러다임 속에 함몰시켜 새로운 남북관계 ‘번역’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다. 사진은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금강산관광지구. 연합뉴스
남북관계를 번역하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으로 ‘번역’되는 남북관계는 오히려 상상력의 족쇄가 될 수 있다.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경제주의’, 과거 패러다임 속에 함몰시켜 새로운 남북관계 ‘번역’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다. 사진은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금강산관광지구. 연합뉴스

북한이 금강산 시설 철거를 당분간 연기한다는 통보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위험 방지 차원이다. 당장 2월 말 철거 요구는 넘길 수 있게 됐지만, 지난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철거 지시에 대한 실행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안도만 할 순 없다. 이 참에 향후 대응책과 더 나아가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김 위원장의 철거 지시 발화 행위에 담긴 맥락부터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김 위원장의 직접 지시란 점이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당 통일전선부가 아니라 최고지도자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심대하다. 일단 번복이 쉽지 않다. 최고지도자의 지시가 갖는 절대적 무게감, 그 밑에서 마음대로 수정ㆍ변경하기 힘들다. 최고지도자의 마음을 바꿀 결정적인 ‘모멘텀’이나 ‘변화’가 없는 이상 ‘번복’은 쉽지 않단 얘기다. ‘철거’ 지시를 통해 사실상 대남정책 운용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것이다.

둘째, 남북관계에 대한 ‘충격적 환기’다. 김 위원장은 “손쉽게 관광지나 내여 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은 북한이 경제난 여파 속에서 ‘선군’을 표방하며 국가를 비상관리하던 시기의 산물이다. 외부 지원과 외화가 절실했던 시기의 선택이다. 김 위원장의 비판 속에는 날카로운 대남 메시지가 담겨 있다. 더는 그때의 북한으로 자신들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대북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30여년에 걸쳐 뿌리 내린 시장화의 질서, 북중 교역 의존도는 높지만 민생경제는 일정한 안정성을 띠고 있다. 나름대로의 경제개혁조치, 개발계획을 내놓고 고투 중이다. 전략적 환경도 바뀌었다. 핵무기 고도화 수준에서 자신을 ‘전략국가’로 지칭하고 있다. 미중 경쟁 구도도 노골화됐다. 동북아 지정학적 환경도 신냉전 구도다. 중ㆍ러의 전략적 제휴, 북한의 편승 가능성, 미국의 대응이 교차하는 속에 남북이 있다.

철거 지시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남측이 ‘긍정적 착각’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북 제재, 합의 이행, 한미 공조를 뒤로 놓아두고도 일단 남북대화가 지속되면 남북관계는 긍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강한 불만’이다. 남한이 ‘민족사업’이란 관념으로 2000년대 초 ‘패러다임’ 속에 있으면서 대북 제재와 한미 공조에서는 옴짝달싹 못 하는 이중 속박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금강산 철거 지시는 이에 대한 충격적 ‘환기’ 방법이다. 일종의 ‘반발로서의 배제 전략’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일종의 ‘헤게모니적 안보관’이 있다. 가령 중상층 남성, 미국 유학,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한 안보관이다. 이 안보관이 주류인 이상 남북관계는 동맹과 안보를 넘어서기 힘들다. 남북 경협이냐 대북 제재 우선이냐는 이분법적 논리 구조에서 무엇이 합리적인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남북관계를 번역하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으로 ‘번역’되는 남북관계는 오히려 상상력의 족쇄가 될 수 있다.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경제주의’, 과거 패러다임 속에 함몰시켜 새로운 남북관계 ‘번역’ 가능성을 제약할 수 있다.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 한반도ㆍ동북아는 거대하고 조밀한 군사ㆍ기술적 시스템으로 복잡하게 연결ㆍ배열된 공간이다. 북한이 ‘선군’이 아닌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다. 역내 국가 중 사실상 선군이 아닌 나라는 없다. 미국은 ‘전쟁국가’로도 불린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에서의 연설은 새로운 번역의 힌트가 될 수 있다. ‘전쟁 불가ㆍ상호안전보장ㆍ공동 번영’이다. 이제 ‘경협’보다는 ‘상호안전보장’, 협력 안보를 통해 남북이 윈-윈하는 전략과 프레임이 필요하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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